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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May 12. 2021

코로나 시대의 죽음

왜 그렇게 펑펑 울었을까.


10살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마도 가을이었다. 발인을 하던 아침에는 쌀쌀했지만 장지로 향하는 시골길로 상여가 들어섰을 땐 이내 따스하게 기온이 올랐다. 비도 오지 않고, 구름도 없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른들과 조금 떨어져 걸으니 TV에서나 보던 꽃상여가 두둥실 시골길을 따라 떠가는 듯 보였다. 이윽고 산 중턱에 위치한 묫자리에 상여가 닿았고, 제일 경험이 많아 보이는 어르신의 지시 속에 절차가 진행됐다. 어떤 순간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갑자기 가족들이 울기 시작했다. 형식적으로 우는 사람, 정말 우는 사람,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중풍과 치매를 동시에 앓았던 할머니를 몇 년간 옆에서 돌봤던 엄마도 봉분을 앞에 두고 울었다. 엄마가 울자 옆에 있던 나도 따라 울었다. 엄마가 울고 형도 울자 내 옆에 있던 동생도 따라 울었다.


지난달.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요양병원 침대 위에서 5년 가까이 누워계셨고 어느 날 새벽에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4월의 날씨는 (송홧가루가 날리긴 했지만) 화창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라고 다시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추모공원 한편에 있는 잔디장으로 모셨다. 봉안당에 모시고 있던 외할아버지의 수골함도 가져와 한 자리에 모셨다. 잔디장이 정해진 자리에는 작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천막이 하나 놓였고, 그 아래 절차를 위한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화장 후 수골함을 들고 가족들이 자리에 모였다. 담당 직원이 수골함을 들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라던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은 때부터 빈소에 있던 순간까지 울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있었는데 그 순간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내가 울자 나와 손을 잡고 있던 첫째 아이가 당황했나 보다. 아빠의 눈물을 보고 아이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아빠 왜 울었어? 슬펐어? 아빠 우는 거 처음 봤어. 아빠가 울어서 나도 울었어”

잔디장의 모든 절차를 마치고 언덕을 내려오는 길에 아이가 말해줬다. (다만 동네방네 아빠가 울었다고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외할머니가 계시던 요양병원도 코로나 창궐 이후에는 병문안 전면 금지였다. 가볼 수는 있었지만 마치 신생아를 만나듯이 유리창 너머로만 지켜봐야 했다. 외할머니는 새벽에 돌아가셨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병상 위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 담당의가 출근하기를 기다려 사망 확인을 받고, 망자의 코로나 검사를 완료한 후에야 영안실로 옮길 수 있었다. 자식들은 그제야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얼굴을 봤을 것이다.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고, 우리 엄마를 포함한 세 명이 지척 거리에 살고 있다. 부르면 30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다. 가장 멀리 사는 막내아들도 한 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다. 임종이 가까워졌다면 연락이라도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의료진이 입는 방호복이라도 입고 만나게 해 줄 수 없었을까. 치매가 있었던 외할머니도 돌아가시던 순간에는 보고 싶은 사람, 찾고 싶은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을까. 물론 방역 지침에도 나름의 이유와 기준이 있고 절차가 있다.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국민이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코로나 시대의 죽음도 거리두기를 이런 방법으로만 지켜야 했는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아쉽다.


화장을 마친 외할머니의 유골은 정말 한 줌이었다. 다섯 자식을 낳고 기르고 농사를 짓고 10명의 손주들의 재롱을 지켜봤던 외할머니가 너무나도 작고 가볍게 남아 있었다. 한 줌도 안 되는 뼛가루가 흙과 섞여 머리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에 묻힐 때 한 번 더 목구멍이 왈칵거렸다. 


5년 전. 첫째가 태어나고 약 백일 정도 됐을까. 구정 세배를 드리러 외가에 갔다. 아이가 잠들었길래 안방에 눕혔다. 세배도 드리고 거실에서 과일을 집어 먹으며 남편의 외가가 어색할 아내와 앉아 있었다. 명절 음식을 내어준 (평소 별다른 표현 없이 무뚝뚝하던) 외할머니는 안방에 들어가 곤히 자고 있는 증손녀를 곁에서 한참 쳐다보셨다. (그러고 보니 그때 보여드린 내 아이가 외할머니의 유일한 증손주가 됐다)


15년 전. 병역기간 중 휴가였던 어느 날. 부모님 모두 출근하시고, 갑자기 냉이가 먹고 싶어져 혼자 외가에 갔다. 냉이 캐러 왔다는 손자를 보고 외할머니는 잠깐 놀라셨지만 이내 비닐봉지와 과도를 하나 챙겨주셨다. 집 뒤 밭에서 냉이를 캐고 있으니 경로당에 볼일을 마친 외할머니도 나뭇가지 하나 꺾어 들고 냉이를 캐러 오셨다. 냉이는 지천에 널려 있었고, 잠깐 사이에 한 봉지를 가득 채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손자에게 외할머니는 당신이 캔 냉이도 한 봉지 더 들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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