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복도를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지난 반년동안 날 수도 없이 고민하게 만들었던 갈림길.
이젠 더 코너만 지나면 난 결정을 해야 한다.
'어디로 가지? 어느 쪽으로 가야 되지?'
환자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CT실, 아니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로 수술실로?
판단은 집도의의 몫이다.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왔다.
항상 그 갈림길 앞에서 고민을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난 아니었다. 고민이 필요 없었다.
나 대신 내가 갈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왼쪽이라고 하면 왼쪽 깜빡이, 오른쪽이라 하면 오른쪽 깜빡이를 켰다. 안정적이고 편했다.
문제가 생겼다. 나만의 내비게이션과 분리가 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무서웠다. 두려웠다. 선택에 대한 불안.
이는 내게 우유부단함과 결정 장애를 선물로 줬다.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이었기에 버리고 싶었지만, 이 또한 쉽게 버릴 수 없었다. 어떤 선택이 좋은 것인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조차도.
나는 그동안 내 삶의 집도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던 것이다.
집도의가 되기까지 다양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
난 그것을 놓쳤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 안에서 문제를 찾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닌 나를 둘러싼 사회, 부모를 탓하고 싶었다.
이 길이 옳다고 끌어당긴 부모님, 나의 존재를 부정한 선생님, 정해진 틀에 갇힌 주입식 교육만 비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생각하려는 노력조차 안 했다. 그냥 나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나의 심장을 멈추게 한 것이다.
나이 오십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지금에서야 심폐소생술을 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이론이 아닌, 현재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고 보다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한 결정과 추진. 이래서 저래서 살기 어려웠다 라는 변명 따위는 이제 하지 않으려 한다.
‘너 때문에’는 이제 그만.
내 삶의 집도의는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