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가 박스 모양인 거 알고 있었어?"
얼마 전 친구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평생 성경을 보며 살아왔지만, 방주가 박스 모양이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친구의 추천을 받아 창조과학회 소속의 선교사님께서 하시는 노아의 방주 세미나 영상을 보면서 왜 방주가 박스 모양이라 후대 과학자들이 추측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미국의 창조과학회에서는 방주의 실제 모형을 만드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라 한다.
영상을 보면서 정말 신기했던 것은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방주의 규격이 배의 안정성을 판단하는 3요소인 구조 안정성, 복원 안정성, 파랑 안정성을 만족시키는 최고의 비율이라 한다. 10:1.7:1. 나는 조선학을 잘 몰라서 알 수 없지만, 실제 조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이 비율은 유명하다고 한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설계를 직접 하신 것이다. 온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 비율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 비율대로 방주가 지어졌고, 방주는 홍수의 기간 동안 노아 가족과 동물들을 완벽하게 지켜냈다.
선교사님은 노아의 방주에 대해 설명하면서 똑같은 질문을 10번 넘게 물으셨다.
"당신은 보트에 타고 싶습니까, 박스에 타고 싶습니까?"
흔히 상상하는 노아의 방주 모형은 보트이다. 보트는 스스로 운전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배다. 하지만 박스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박스의 용도는 물 위에 떠있는 것이다. 즉 자신을 물 위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이끄시는 대로 스스로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선교사님이 묻고 싶은 것은 사실 이 질문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영상을 보며 문득 나는 지금 세상이란 홍수 속에서 예수님이란 박스를 타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홍수 속에 있고, 내 스스로 헤쳐 나가기에는 하루의 삶이 너무나 험난한데, 나는 여전히 내가 보트를 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고 있다. 내 스스로 살아가다가 꼭 무너진다. 그리고 다시 회개한다.
영상의 말미에서 눈물이 났던 까닭은 어제 나에게 있었던 일 때문이다. 어제 어떤 사람에게 메시지가 왔다. 반년 전 문화센터에서 만났던 아기 엄마이다.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되었다고 한 번 만났으면 한다는 연락이었다. 길게 한숨이 쉬어졌다.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년 전, 문화센터에서 호두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마침 자주 마주치던 같은 반 엄마와 약속을 잡았다. 함께 밥도 먹고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그런데 대화할수록 삶의 가치관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호두에게 동영상 노출을 아직 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이야기하기 위해 아기들에게 2시간이 넘게 만화를 틀어 주는 그 엄마의 행동을 보고 이제 놀러 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만들어 주려 추운 겨울에 30분이 넘게 유모차를 끌고 간 집이었는데, 결국 아이가 친구와 놀지도 못하고 만화만 보고 나왔다. 나는 호두의 친구가 필요했고, 그 엄마는 자신의 친구가 필요했다. 입장의 차이가 컸다.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고, 사는 곳 또한 멀었기에 그렇게 인연이 끝났다 생각했다.
그런데 반년 뒤 그 엄마의 연락이 다시 온 것이다. 내 생각에 그녀가 배려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쁘게 헤어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메시지에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하고, 애매한 질문은 회피하며 내가 그렇게 호의적인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친구가 필요한 것인지 그분은 나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난 다른 이들보다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가 크다. 왜 그런 것인가 최근 곰곰이 생각해보니 20여 년 전의 일들이 기억이 났다. 나는 초등학교를 4번이나 바꿨다. 한 곳에 2년 이상 머물러 본 적이 없다. 끊임없이 이사를 다니며 그 어느 인간관계에도 정착할 수가 없었다. 이제 좀 친구를 만들라 싶으면 전학을 가고, 이제 좀 정이 든다 싶으면 또 전학을 갔다. 바뀌는 환경만큼이나 내 마음도 불안정해졌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신뢰하기가 어려워졌다. 어딜 가도 나는 중간에 전학 온 이방인이었기에 몇 달간은 왕따 아닌 왕따가 되어 살아갔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며 나는 인간관계에 대한 상처가 점점 커졌다. 누구든 경계하게 되었고, 누가 조금이라도 나를 힘들게 하면 남들보다 몇 배는 스트레스를 느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이가 계속 연락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데, 나는 앞서 말한 일들로 인해 신경이 많이 쓰이는 성격이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이 분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이분은 저에 대한 배려도, 호두에 대한 배려도 없는 분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분과 저는 삶의 가치관도 전혀 달라요. 이분과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그때 하나님께서 뜬금없는 질문을 하셨다.
"그런데 너 지난번에 성경 읽을 때 네가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네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지 않았니? 그 약속은 어떻게 된 거야?"
당황스러웠다. 그때 나는 이 분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분이 다시 내 삶에 나타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분과는 할 이야기도 없는 걸요."
"나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너에게 매일 성경으로 말하는데, 그럼 너는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거니?"
"하나님, 이분에게 뜬금없이 예수 믿으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분은 너무나 세상적인 사람인 걸요. 하나님을 믿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요."
"그러니까 네가 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지. 그래야 복음도 전하는 거 아니겠어?"
할 말이 없었고, 더 이상 하나님께 대답하기가 싫어졌다. 가뜩이나 없는 내 자유 시간을 그분과 나누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침묵에 하나님도 침묵하셨다. 나는 말없이 설거지를 하고, 말없이 아이를 돌보며 하나님께 내내 침묵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점점 편안해졌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은 누군가가 내 삶에 내 허락도 없이 찾아와서 나를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나는 박스 안에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이분이 내 삶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해졌다. 이 분이 내 삶에 들어온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인 거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내가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오히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럼 이렇게 할게요. 우리 대화가 애매하게 끝이 났어요. 아마도 제 반응이 시원치 않다는 것을 그분도 느끼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연락이 온다면 그때는 그분을 만날게요."
늦은 밤 하나님께 마지막 내 의견을 말씀드렸다. 하나님은 오케이 사인을 보내셨다. 그리고 바로 오늘, 나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 노아 홍수 세미나 영상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관계에 대해 지극히 예민하고 두려운 나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고, 그 마음을 잘 아시기에 나를 좀 믿어보라 말씀하신다. 너는 내 박스 안에 있어, 걱정하지 마, 너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은 내가 다 제어하고 있어, 다 내가 보낸 사람이야. 하나님은 계속 나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에게 순종하라 말씀하신다. 내가 보낸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해주라고. 다 이유가 있고, 뜻이 있어 그런 것이니 너는 그저 순종하라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나는 고슴도치에 가깝다. 누군가 나를 상처 줄까 봐 잔뜩 가시를 세우고 모든 이를 경계하고 있다. 어릴 때 받은 너무 많은 스트레스와 상처가 이 가시를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너무나 안타깝게 쳐다보고 계신다. 그리고 정말 이해할 수 없게도 꼭 인간관계를 통해 일하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황이라 생각한다. 많은 이들의 사랑 속에 내가 안정을 찾고, 또 이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
당신은 보트에 탔는가, 박스에 탔는가. 카카오톡 메시지 한 통 조차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제어하고 계심을 믿는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사랑해야만 하고, 가야 할 길은 가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나는 박스에 탔고, 또 한 번 그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매일 성경을 읽으며 다시 깨달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박스가 있기에 오늘도 감사한다. 나의 모든 발걸음, 손짓 하나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시단 사실을 깨달았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