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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자의 외출

그래도 지금의 내가 좋다

by 김용진

외출 준비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는 나


예전에는 아침에 눈 뜨면 대충 차려입고 그냥 나갔다.
얼굴에 물 한 번 튼 뒤 크림 하나 바르고
옷장 문 열어서 손에 잡히는 옷 입고
머리는 그냥 손으로 한번 훑으면 끝이었다.
그때는 준비 시간이 아니라 출발할 마음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요즘, 나의 아침 풍경은 다르다.
일어나면 스킨, 에센스, 수분크림, 선크림, BB크림…
단계를 하나하나 챙기며 ‘이것도 발라야 했지’라는 생각이 따라붙는다.

머리도 대충 넘기지 않는다.
가볍게 손질했다가 다시 드라이를 들고,
머리칼 사이사이를 띄워 올리고,
스프레이로 마무리하며 거울 앞에서 시간을 더 쓴다.


그리고 옷.
날씨에 맞아야 하고, 편해야 하고, 멋도 있어야 한다.

마음 속 체크리스트가 늘었다.
오늘 일정은 뭐였더라?
걸을 일이 많을까?
사람을 만나나?
클래식하게 갈까, 편안하게 갈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거울 앞에서 세 번쯤 입고 벗는다.

한 번은 ‘너무 캐주얼’ 같고
한 번은 ‘너무 힘준 느낌’ 같고
또 한 번은 ‘오늘 나와는 톤이 안 맞네’ 싶다.


분명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불안하다.
목도리를 놓고 온 것 같고,
이어폰을 빠뜨린 것 같고,
약을 챙겼나 애매하다.
결국 현관 비밀번호를 다시 누르고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이다.


예전에는 이런 나를 보며

‘왜 이렇게 까다로워졌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게 본다.
이건 느려진 게 아니라, 나를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중년이라는 시간, 생각이 깊어지는 시기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단순히 주름이 생기고 머리칼이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다.
삶의 속도와 시선이 달라지는 경험이다.

젊을 때는 속도가 미덕이었다.
‘빨리 준비해서 빨리 집을 나가고, 빨리 어디든 닿는 것’이 능력 같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준비하는 시간이
나를 안정시키고,
나를 다독이고,
하루를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내 얼굴을 더 오래 들여다보는 것도
단순히 주름을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나를 인정하는 과정이다.

머리를 다듬으며 비어가는 자리도 보인다.

하지만 한숨 대신 묘하게 웃음이 난다.
‘그래, 이것도 나다.’
나의 시간과 경험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니까.

옷을 고르며 망설이는 것도 비슷하다.

보이는 나와 느끼는 나의 균형을 찾는 과정이다.
이제는 외모가 목적이 아니라
나답게 존재하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느려진 게 아니다. 더 정확해진 것이다

중년이 되어 알게 된다.
예전보다 느려 움직이지만
그만큼 실수가 줄었고
그만큼 내 마음에 맞는 선택을 한다.


집 안에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지갑을 다시 만지고
블루투스을 체크하고
문단속을 꼼꼼히 하는 이유는
불안이 아니라 책임감이다.


세상이 나를 밀지 않아도
내가 나를 챙기는 태도이다.


이건 조금 늦게 알게 된

‘내 삶의 품격’이다.


중년, 나를 다시 디자인하는 나이이다


이 시기에 필요한 건 아쉬움이 아니다.
지나간 시간에 손 흔들고
지금의 나와 손을 잡는 것이다.


중년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지는 시기이면서
지금 이 순간이 더욱 귀해지는 시기다.


그래서 더 천천히 준비한다.
그래서 더 신중하게 고른다.
그래서 더 많이 챙긴다.


그게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뒤돌아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잘 늙어가고 있다.

조금씩 더 다정해지고
조금씩 더 나를 아끼고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다.
준비 시간이 길어졌다는 사실에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 시간만큼 내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의미이니까.

오늘도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지금이
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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