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떠나야만 보이는 것들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by 하늘바라기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짐을 쌌다.

크지 않은 배낭 하나. 옷 몇 벌, 세면도구, 노트 한 권. 가벼웠다.

그런데 마음은 무거웠다.

'이게 맞나?' 자꾸 물었다. 회사에 휴가를 냈다. 2주.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부담스러웠다.

동료들의 눈치가 보였다. "요즘 바쁜데 휴가를 가?" 말하지 않았지만 느껴졌다.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이 떠날 타이밍은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떠나야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다.

출근하고, 일하고, 약속을 지켰다. 웃었고, 대답했고, 살아갔다.

그런데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를 잃어버린 게.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서서히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 순간 거울을 보는데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

지친 눈빛. '이게 나인가?' 싶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해외여행 가봐. 유럽이나 동남아." 멀리 가야 힐링이 된다고 했다.

이국적인 풍경, 낯선 언어, 다른 문화. 그래야 일상을 벗어날 수 있다고.


그런데 나는 멀리 가고 싶지 않았다.

비행기를 오래 타고, 시차에 적응하고, 외국어로 주문하는 것.

그런 것들이 부담스러웠다.

이미 지쳐 있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했다. 한국을 여행하기로. 이 나라 어딘가에, 내가 찾는 답이 있을 것 같았다.

바다, 산, 골목. 이름을 들어본 도시들. 가보지 않았지만 낯설지 않은 곳들.

거기서 나를 찾아보기로 했다.


친구에게 말했다. "여행 간다." "어디?" "국내." 친구가 웃었다.

"국내는 여행이 아니잖아. 그냥 나들이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었다. 이건 여행이 아니다.

음... 그저 '나를 찾는 여정'이다.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새벽 5시. 서울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지하철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창밖을 봤다. 터널이 이어졌다. 어둠 속을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그런데 이상하게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됐다.

무엇을 발견할지 몰랐지만,

뭔가 발견할 것 같았다. 잃어버린 나를. 숨어 있던 나를. 잊고 있던 나를.

서울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출근하는 사람, 여행 가는 사람,

고향 가는 사람.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나는 어디로 갈까?

계획은 느슨했다. 강릉, 속초, 설악, 전주, 담양... 이름만 있었다.

언제 가고, 얼마나 머물고,

무엇을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정하지 않는 것이 계획이었다.


기차에 올랐다. 창가에 앉았다. 기차가 출발했다. 서울이 멀어졌다. 빌딩이 작아졌다.

도시가 사라졌다. 들판이 나타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떠나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도착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이 과정 자체가, 이 움직임 자체가, 이 떠남 자체가 의미라는 것을.

창밖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뭘 찾게 될까?' 답은 몰랐다. 그냥 가기로 했다.

천천히. 나를 향해. 한국의 어딘가에서 나를 만날 것이다.

낯설지만 익숙한, 멀리 있지만 가까운, 그 나를.


햇빛이 들어왔다. 아침이었다. 새로운 하루. 새로운 시작.

나는 눈을 감았다. 마음속으로 말했다.

'안녕, 나. 오랜만이야. 이제 찾으러 갈게. 기다려.'

기차는 달렸다. 나도 달렸다. 나를 향해.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여기 대한민국 어딘가에, 내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