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브라이언트 로저스 - 실리콘과 세상을 연결

by JBO

1963년 가을,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패키징 연구실에 한 명의 엔지니어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는 좌절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도면들이 뿌려져 있었고, 장난감 우주선처럼 생긴 금속 캔 샘플들이 굴러다녔다. 여기에 빈 커피 잔 세 개.


1960년 잭 킬비와 로버트 노이스가 제시한 평면 공정으로 인해 전자회로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다. 초록색 기판과 전자 부품,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납땜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고성능 직접회로 칩이 기존의 부품들을 대체하면서 전자회로 구성에 대한 혁신이 필요했다. 칩의 성능을 완벽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더 복잡한 회로 구성이 필요했고, 칩에서 발생하는 열을 효과적으로 분산시켜 과열되지 않게 만들어야만 했다. 항상 그렇듯, 필요한 사항을 정리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 그렇게 구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페어차일드 연구소의 브라이언트 로저스(Bryant Rogers, 1930~1995)는 이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브라이언트 로저스는 1930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기계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는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다소 괴팍하지만 다정했던 아버지로 인해 궁금한 것을 바로 해소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아버지의 너저분한 작업장은 그의 놀이터였다. 고장난 물건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일들이 그의 주된 놀이였으나, 아버지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힌 아들에게 한 마디씩 조언을 해주었는데, 가장 자주 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어라. 네가 부딪힌 문제가 아직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너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의 이 조언은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훈련받은 청년은 MIT에 입학했다. 전공은 당연히 전기공학이었다. 학부 과정에서 그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벨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반도체 트랜지스터를 개발했다는 것이었다. 10대 시절부터 축음기와 라디오를 분해 조립하던 로저스는 덩치만 큰 전자회로가 매우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항상 작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민했는데, 반도체 트렌지스터는 그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열쇠였다. 비록, 그가 직접 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 소식에 매우 열광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그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의 석사 졸업 논문은 <소형 전자 패키징 연구>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 논문을 인정받아 꿈에 그리던 벨 연구소에 입사했다. 1954년 가을, 뉴저지 머레이 힐의 근사한 단풍이 그를 환영하고 있었다.


벨 연구소에서 로저스는 트랜지스터를 중심으로 혁신적인 전자회로를 설계하고, 생산 공정을 개선시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트렌지스터를 보호하고, 쉽게 전자회로에 부착하기 위해 처음 고안한 것은 TO-can(Transistor Outline can)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 금속 부품은 작은 우주선 같기도 하고 우수꽝스러운 주전자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이 당시의 트랜지스터는 분명 대단한 혁신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외부 충격이나 습기 등에 매우 취약해 이를 잘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트랜지스터만을 위한 보호 장비가 필요했는데, TO-can이 그 역할을 했다. 이 안에 트랜지스터를 고이 모셔두고, 잘 밀봉한 다음 외부에 나와 있는 금속 다리를 통해 전자회로에 부착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이 공정을 최적화시키는 일은 시간이 좀 걸렸지만, 금새 안정화되었다. 그 덕분에 금속 캔을 밀봉하는 공정이 개선되었고, 수율이 높아지면서 제조 비용이 획기적으로 절감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 프로젝트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었다. 복잡한 문제를 고민하면서 최적의 해답을 찾는 것이 유일한 기쁨인 로저스에게 벨 연구소의 보수적인 문화는 불편한 베개같은 것이었다.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다.


때마침 반대편 서부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매일 벌어지고 있었다. 8인의 배신자와 페어차일드의 설립은 로저스의 마음에도 불을 붙였다. ‘서부로 가야겠다.’ 지인들은 최고의 직장을 떠나 서부의 꼬맹이들에게 가겠다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다행히 그의 아내와 가족들은 그를 지지했다. 1960년 6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수석 패키징 엔지니어. 페어차일드에서 그의 직책이었다. 허름한 건물과 활기찬 분위기, 그리고 높은 과학적 토론 등이 공존하는 곳에서 그는 비로소 해방감을 느꼈고, 금새 일하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큰 시련과 도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어차일드는 획기적인 공정으로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한 직접회로 칩을 개발했다. 이 칩을 가지고 회로를 구성하면, 라디오, TV, 그리고 컴퓨터 등 당시의 첨단 전자기기들을 효율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칩을 중심으로 회로를 구성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초기 칩은 수 십개의 트랜지스터가 직접된 단순한 형태여서 칩에 전선을 연결하고 이를 다시 TO-can에 부착해 회로에 붙이는 전통적인 방식이 유효했다. 조금 더 정밀한 일이었지만, 교육만 잘 시키면 공정 작업자들이 충분히 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어의 법칙에 환장한 칩 설계자들은 트랜지스터의 직접도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기 시작했다. 초기의 TO-5 can은 8개의 다리를 가진 형태였는데, 몇 년 만에 한계를 맞았다. 로저스는 임기응변으로 8개의 핀을 12개로 늘렸으나, 말 그대로 임시방편이었고 뭔가 새로운 해법이 필요했다. 이 해법을 찾기 위해 로저스는 끊임없는 연구를 해야했고, 대부분 실패했다. 실험실에서 머리를 쥐어 뜯게 만드는 날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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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여름이 지나면서 직접도가 더 높은 칩들이 개발되었다. 로저스의 패키징 팀은 일단 기존의 TO-can의 핀 수를 16개로 늘려봤다. 작은 원형 캔 밑에 16개의 다리가 달린 이상한 형태가 완성되었는데, 핀 간격이 너무 좁아지고 제작도 어려워 수율이 낮아졌다. 또한, 로저스 팀은 칩 패키징을 자동화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16핀의 TO-can이 성공하더라도 자동화에 걸림돌이 될 게 뻔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 경쟁사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누구든 해법을 찾아야 하고, 찾는 기업이 한 발 앞서게 되는 상황이었다. 칩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로저스를 압박했다. 패키징이 걸림돌이 되어 칩 집적도를 올리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로 로저스를 압박했다. 흔히 말하는 병목현상, 이후에는 ‘제약 이론 (Theory of Constraint)’으로 불리는 현상-혁신이 멈추는 이유는 수많은 문제가 아니라, 항상 소수(대개 하나)의 제약 때문이라는 관점-이 발생했다. 1963년 어느 때보다도 화창하던 샌프라시스코의 날씨와 다르게 로저스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image.png TO-can의 일반적인 구조


1963년 9월 말, 금요일 오후였지만, 로저스는 전혀 여유롭지 못했다. 패키징 팀원들은 하나 둘씩 퇴근했지만, 로저스는 아이디어 노트를 다시 꺼냈다. 우선, 그는 새로운 패키징에 필요한 사항들을 차분하게 다시 정리했다. 16개 이상의 많은 연결선이 필요하고, 제조 비용이 적어야하며 회로 기판에 쉽게 연결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자동화도 가능해 비용을 더 줄이고 수율을 높이는 일들이 가능할 것이었다. 동그란 모양의 TO-can에 어떻게 해야 이런게 가능할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모형 캔과 칩을 나란히 놓고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불일치하는 지점이 떠올랐다. 칩은 사각형인데, 캔은 왜 원형이어야 할까? 생각해보면 굳이 원형일 필요가 없었다. 초기 진공관 트랜지스터를 대체하면서 원형이 더 좋아보여 그렇게 굳어진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반도체 칩은 그렇지 않다. 로저스는 재빨리 사각형 패키징을 스케치했다. 회로 기판과 연결을 위한 핀의 위치가 중요했다. 처음 설계는 4각형 4면에 분산시키는 것이었으나,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 올랐다. 회로 기판은 평면이고, 공정 자동을 위한 조립 기계들은 직선으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핀을 사각형의 마주보는 두 면에 이열종대로 배치하면, 조립 과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칩의 집적도가 높아져 핀의 수를 늘려야 한다면, 패키징을 직사각형으로 길게 만들면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할 것이다. 스쳐간 아이디어를 구체화할수록, 로저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뭔가 대단한 제안이 가능할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케치를 그려 놓고 부족한 점을 찾으려 했으나, 다행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날을 고민해왔던 문제들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조언처럼 복잡한 문제가 단순해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즉각 채택되었다. 이름도 그의 아이디어를 반영했다. ‘이열종대 패키지’라는 의미의 ‘Dual In-line Package, 이후에 일반명사처럼 사용되는 DIP의 시작이었다. 문제가 단순해지자, 그동안 그들을 괴롭혔던 모든 일들이 술술 풀렸다. 전체 회의에서 여전히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시제품을 만들어 본 후 결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로저스와 2명의 엔지니어는 즉각 시제품 제작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로저스의 초기 스케치가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만큼 완성도가 높은 아이디어였고, 한 편으로는 로저스가 그만큼 깊게 고민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직사각형의 케이스에 구리판을 덧대어 16핀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테스트용 칩을 에폭시 접착제로 부착시켰다. 여기에 금으로 제작된 전선을 칩과 핀에 연결하고 뚜껑을 닫아 외부와 차단시켰다. 비교적 쉽게 시제품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시제품을 회로 기판에 장착시켰다. 남은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지 평가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정상 작동이었다. 실제 해보니, TO-can보다 훨씬 쉬운 작업이었다. 이제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로저스와 그의 팀은 만들 수 있는 모든 패키지를 다 만들어 봤다. 14핀, 16핀 등의 시제품이 제작되었고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DIP의 장점은 분명했다. 칩의 성능에 맞춰 핀의 수를 늘릴 수 있었고, 이미 익숙한 공정을 활용하기에 작업자들도 쉽게 적응했다. 표준화가 가능하고 수율이 높다보니 제조 비용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이런 장점들을 확인한 사람들 사이로 슬슬 그의 이름이 퍼져 나갔다. 패키징 연구부서에 엄청난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의 이름이 유명한 SF 드라마의 주인공 ‘Buck Rogers’와 같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로저스를 부를 때 Bryant ‘Buck’ Rogers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그만큼 로저스는 유명 인사가 되어갔고, 실제로 DIP는 산업의 표준으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로저스는 성공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또 다른 문제를 찾기 시작했고, 어려운 문제를 단순하게 만든 후 이를 해결하는 데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가 발견한 문제는 DIP의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그럴려면 두 가지가 해결되어야 했다. 공정을 표준화해 자동화 비율을 높이는 것과 범용 재료를 사용해 고가의 부품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또 다시 고민의 시간이 지속되었다. 그래도 이미 보여준 것이 있어서 회사의 지원은 충분했다. 약 6개월이 지난 1964년 겨울, 드디어 상용화가 가능한 DIP 모델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65년 초 DIP가 적용된 첫 반도체 칩 모듈이 출시되었다. 14pin을 가지고 있었고, 플라스틱 재료를 사용해 원가를 감소시켰다. 칩과 부품을 연결하기 위해 패키지에 구멍을 내는 게 어려웠는데, 자동화 공정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첫 제품의 가격은 개당 $20이었다. 기존의 TO-can보다 약간 비싼 가격이었지만, 이는 정밀한 시장 조사의 결과였다. 성능과 편의성이 우수하니 조금 비싸도 사람들이 좋아할 것으로 예상했고, 결과는 예상대로 매우 열광적이었다. 페어차일드에서 뭔가 큰 것을 해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Buck Rogers라는 별명도 같이 붙어다녔다. 외부에서 보기에 페어차일드에는 로저스와 무어 외에 우주선을 타고 다니는 수퍼히어로가 있는 것 같았다. 마침 이름도 드라마의 영웅과 같았고, 그의 발명품은 말 그대로 산업의 틀을 옮기는 ‘게임 체인저’였다.


약 1년이 지난 후에 경쟁사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가 슬며시 DIP를 채택했고, 이후에는 Motorola, RCA 등 잘 나가는 기업들도 경쟁적으로 도입했다. 페어차일드와 로저스는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른 기업들의 사용을 금지하거나 높은 사용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의 전략을 취했다. DIP가 산업 표준이 될수록 생태계 전체가 성장하고 장기적으로는 이게 더 이익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낭만이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이로 인해 로저스는 더 영웅같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1966년, 반도체 공정을 위한 민간협의회(Joint Electron Device Engineering Council, JEDEC)은 DIP가 산업의 표준이라고 발표했다. 이어서 표준 규격이 결정되었다. 14핀의 DIP-14부터 40핀인 DIP-40까지 한꺼번에 발표되어 칩의 발전 속도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규격이 되었다. 이제 새롭게 출시되는 반도체 칩은 모두 DIP라는 포장지에 담겨 있었다. Intel 4004는 DIP-16, Intel 8080은 DIP-40, Motorola 6800도 DIP-40을 사용했다. 상대적으로 직접도가 낮았던 메모리 칩들도 DIP를 사용했다. 1970~1980년대는 DIP의 전성기였다. 모든 전자기기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전자회로 위에 DIP 칩들이 가득차기 시작했다. 신뢰성이 개선된 제품들이 계속 개발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로저스의 스케치북과 다르지 않았다. 1985년 동료들이 만들어준 은퇴기념식에서 로저스는 짧게 그의 감상을 전했다. 그의 성격대로 거장의 은퇴사치고는 매우 간단한 말이었다.


“나는 복잡한 것이 싫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고, 이게 산업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1980년 중반을 넘어서면, 모든 전자기기들이 소형화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전자회로는 미친듯이 고밀도 경쟁을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전자 부품의 다리를 기판 구멍에 삽입하는 기존의 방식은 한계가 있었고, 회로 기판의 표면에 직접 부품을 올려놓고 납땜하여 전자 회로를 조립하는 ‘표면 실장 기술(Surface Mount Technology, SMT)’이 등장했다. 이에 따라 DIP는 점차 SMT 방식에 밀려나기 시작했고, 현재는 첨단기기에서 거의 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SMT 방식도 DIP가 없었다면 도달하기 힘든 해법이었을 것이다.


1995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한 로저스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업계의 모든 사람들이 조의를 표현했다. 당시 인텔의 CEO였던 앤디 그로브는 반도체 산업의 최고 혁신가로 그를 추앙하고, 그의 사망에 아쉬움을 전했다.


비록 DIP는 이제 새로운 혁신에 밀려났지만, 로저스의 철학은 이 산업에 계속 전해지고 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내 단순화하고 산업 전체를 위해 표준화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빠르게 발전하는 반도체 칩을 고려해 확장성을 고려한 설계. 그가 제시한 단순한 해법의 아름다움과 표준화의 가치는 산업을 관통하는 열쇠가 되었다. 비록 노벨상을 받거나 높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로저스는 그의 별명처럼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시대를 연 영웅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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