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민스크와 쉬플리 - 실리콘을 지배한 화학

기술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by JBO

1951년 8월, 미국 뉴욕주의 로체스터. 코닥 필름 연구소의 한 켠에서 31세의 청년 과학자가 플라스크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입사한 지는 1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는 누구보다 감광성 화학 물질에 대한 전문가였다. 마침 벨 연구소가 의뢰한 감광성 고분자의 합성을 맡게 되었는데, 불과 6개월 만의 연구 끝에 의미 있는 결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 결과물이 유리 플라스크 속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와 연구팀은 트랜지스터와 미래의 산업 변화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이것이 뭔가 큰 변화를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미래를 모르더라도, 연구는 훌륭하게 성공했고, 이제 특허를 출원하고 제품화하는 일만 남았다. 반도체 직접회로 공정에 새로운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이렇게 탄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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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1년 거슬러, 1950년 가을. 사진 필름 산업의 최강자인 코닥 필름(Eastman Kodak)의 연구소에 동유럽 이민자 출신 청년이 도착했다. 채용 면접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의 코닥은 세계 최고의 기업이었고, 유망한 청년 과학자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어하던 곳이었다. 가난 때문에 어렵게 공부했고, 대학원 등록금 마련을 위해 2차대전에도 참여했던 루이스 민스크(Louis M. Minsk, 1920~1990 )는 이제 막 박사학위를 받고 취업을 위해 이곳에 왔다. 그의 지도 교수인 헤르만 마크(Herman Mark)는 고분자 분석의 세계적인 대가였다. 그의 연구는 당시 막 꽃피기 시작한 합성 섬유의 구조 분석과 제조법 등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는데, 자연스럽게 민스크도 고분자 합성에 관련된 분야를 집중 연구했다. 민스크는 그 중에서도 빛을 받으면 반응이 활성화되는 감광성(Photosensitive) 고분자 분야에 흥미를 느꼈다. 다행히 관련 연구가 잘 진행돼, 졸업 논문도 빛을 쪼여주면 반응이 진행되는 합성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졸업 후 30세의 민스크는 여러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코닥 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다면 다른 고민이 필요없었다. 그의 기대대로, 입사 면접에서 그는 큰 환영을 받았다. 유명한 교수 밑에서 훌륭한 연구를 진행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브루클린의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식당일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고, 대학원 진학을 위해 세계대전에도 참여했던 청년이 당대 최고의 기업에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코닥에서 그는 감광성 물질 연구팀에 참여했다. 더 선명한 사진 인화를 위해 꼭 필요한 연구 분야였다. 당시, 코닥의 연구소에는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연구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민스크는 그들과 함께 사진 인화 물질의 물리적 성질을 개선하는 연구를 담당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뉴저지의 벨 연구소에서 반도체 트랜지스터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몇 몇 과학자들은 그 소식에 크게 흥분했으나, 민스크는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크게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1951년 초, 벨 연구소에서 연구 의뢰가 들어왔는데, 이 것을 계기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연구 의뢰는 이런 것이었다. 벨 연구소에서 개발한 반도체 트랜지스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표면에 정밀한 패턴 작업이 필요한데, 기존의 방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벨 연구소의 연구자들은 사진 인화 공정이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고, 가장 앞서있던 코닥에게 관련 연구를 의뢰한 것이었다.


사진 과학부의 책임자인 에거트(John Eggert)는 벨 연구소의 연구 의뢰가 시기적으로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느꼈다. 마침, 최고의 대학에서 대가의 지도 하에 감광성 고분자를 연구한 신진 연구자가 입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갑작스런 연구는 본인의 의지가 중요한데, 다행히 당사자인 민스크도 이 연구를 적극 환영했다. 1951년 3월부터 민스크는 관련 연구자 2명과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이제 불과 31세가 된 신출내기 학자였지만, 최소한 이 분야만큼은 그가 세계 최고의 연구자였다.


민스크의 박사 논문은 계피산(cinnamic acid) 유도체에 자외선 빛을 쪼이면, 빛을 받은 부분에서 가교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계피산 유도체를 반도체 전면에 바르고, 그 위에 일정한 패턴이 있는 마스크를 덮은 후 자외선을 쪼여주면, 뚫려 있는 부분은 빛을 받아 가교 반응(Crosslinking)이 일어나고, 막힌 부분은 변화가 없을 것이었다. 빛에 의해서 이런 차별성이 발생하면, 패턴 작업이 가능할 것이었다. 빛을 받아 가교 반응이 일어난 부분은 딱딱해졌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일테니 적당한 용매를 부어주면 빛을 받지 못해 물렁물렁한 부분은 씻겨 내려가고 딱딱해진 부분은 그대로 남게 된다. 반도체 기판 위에 회로를 위한 패턴이 생긴 것이다. 이 상태에서 표면에 금속을 증착시키면 반도체 표면과 딱딱해진 고분자 위에 골고루 금속이 묻게 되는데, 이렇게 한 다음에 남아 있는 고분자도 씻겨 내릴만한 강한 용매를 뿌려주면 고분자가 씻기면서 위에 있던 금속도 같이 제거되고, 표면 위에는 증착한 금속 회로만 남게 된다. 벨 연구소는 정확히 이런 공정을 요구한 것이고, 이게 사진 인화 방식과 똑 같아서 코닥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개념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해볼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벨 연구소의 요구사항은 조금 더 정교했는데, 머리카락보다도 훨씬 얇은 10마이크로미터의 해상도와 강한 산성 물질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 큰 과제였다. 벨 연구소의 요구 사항은 듣는 사람들을 모두 의아하게 만들었다. 말도 안되게 어려운 요구를 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퍼졌고, 벨 연구소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허황된다는 말투로 얘기했다. 그러나, 민스크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박사과정부터 수년간 이런 연구를 해왔고, 그가 연구했던 계피산을 조금만 개질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섣부르게 자신감을 보이지는 않고 최대한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도전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민스크는 그가 잘 알고 있는 계피산을 활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를 활용하려면 튼튼한 지지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흔히 볼 수 있는 알코올 계통의 고분자에 계피산을 붙이자는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화학에서는 산성 물질과 알코올 물질의 결합을 에스터(Esterfication) 반응이라고 하는데, 현재도 많이 사용하는 폴리에스터 수지도 이런 반응의 결과물이다. 1951년 기준으로는 매우 획기적인 민스크의 아이디어는 곧바로 적용되었다. 다행히, 코닥 연구소에는 당대 최고의 화학자들이 근무하고 있어서 민스크가 원하는 화합물을 금방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프로젝트 시작 한 달만에 이룬 성과였다. 이후부터는 반복 실험이었다. 계피산을 가장 잘 활성화시키는 파장의 빛을 찾아내고(300nm이하의 파장), 몇 초동안 빛을 쪼여야하는지, 그리고 어떤 용매를 사용해야 선택적으로 고분자를 제거할 수 있는지 등 세밀한 공정 조건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이에 맞추어 감광성 고분자를 개선하는 일도 반복적으로 수행되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민스크 팀의 연구가 짧은 시간 안에 상당한 성과를 보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는 몰랐지만, 사람들은 반도체 공정을 위한 감광성 고분자를 별도로 ‘포토레지스트(Photoresist)’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후에 나온 표현이지만, 빛을 받은 부분이 단단해지고, 받지 않은 부분만 그대로 물렁물렁해 용매에 먼제 제거된다고 해서 ‘네거티브 포토레지스트’가 개발되는 시점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프로젝트 시작 후 불과 6개월만에 인류의 기술을 획기적으로 전진시킬 물질이 개발되었다.


1951년 8월 해상도 5~10 마이크로미터의 포토레지스트 샘플이 벨 연구소에 전달되었다. 더불어 관련 공정에 대한 세부 사항도 같이 전달되었다. 현대의 공정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대단히 혁신적인 공정이었다. 벨 연구소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본인들도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한 의뢰였는데, 이를 뛰어넘는 대단히 훌륭한 결과물이 불과 몇 개월만에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시험 사용 후 곧바로 정식 구매 주문을 넣었다. 당장 제품으로 만들어달라는 소리였다. 민스크와 그의 팀은 대량 생산까지 고려한 제품화 준비를 해야했다. 세밀한 부분까지 조절하다보니 제품 개발보다 오히려 더 시간이 걸렸지만, 이 과정에서 온갖 아이디어들이 도출되었다. 이 아이디어들은 폐기되지 않고 추후에 계속 제품 개발에 적용되어 코닥의 큰 자산이 되었다.


1953년 초 코닥은 한 제품을 조용히 시장에 출시했다. KODAK Photo Resist(KPR). 500ml가 조금 안 되는 한 병의 값이 무려 25불이었다. 이 당시 미국 노동자의 평균 월급의 1/10 수준이었고, 미국보다 훨씬 가난했던 한국 노동자들의 월급보다 높은 가격이었다. 그럼에도 제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연구 의뢰자인 벨 연구소는 물론이고,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와 웨스턴 일렉트릭 같은 기업들도 앞다투어 구매하기 시작했다. 민스크는 이제 유명인사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는 척 했으며, 학회에 참여하면 그와 말을 하려고 경쟁적으로 접근했다. 가난한 이민자의 가정에서 자란 내성적인 청년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운 관심이었고, 그는 자신의 유명세에 현혹되지 않고 곧바로 다음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민스크는 이제 반도체 칩에 관해 제법 지식이 쌓였다.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칩의 직접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고, 포토레지스트도 3마이크로미터 이내로 제작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빛을 쪼이지 않는 부분이 처음에 제거되는 네거티브 방식이 아닌, 포지티브 방식, 즉 빛을 쪼여준 부분이 먼저 제거되는 포토레지스트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찾아보니 1920~30년대 독일에서 비슷한 감광성 물질을 개발한 적이 있었다. 자연계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퀴논(Quinone) 화합물 중 하나가 빛에 의해 분해된다는 실험 결과에 주목해 이를 가지고 수 백가지 조합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별의별 물질들이 다 만들어졌는데, 민스크 팀의 목적에 맞지는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훌륭한 화합물이 되어 다른 용도, 즉 항생제부터 치약까지 다양한 파생 제품이 개발되었다. 반도체 개발과 관련된 인류의 축복은 이렇게 의도치 않은 곳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의도치 않은 결과물이 좋았다고 해도 민스크가 원하는 것이 포지티브 포토레지스트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반도체 트랜지스터의 산업적 중요성이 부각될 수록 민스크 팀의 연구 결과에 대한 관심과 압력이 거세졌다. 첫 성공의 단맛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들은 실험 지옥에 빠져야했다. 이 과정에서 빛 에너지와 화학 반응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넓어져, 이들의 발표 논문은 항상 산업의 핵심 뉴스가 되었다.


5년이 넘는 연구 끝에 1958년 드디어 최적의 배합이 완성되었다. 민스크 팀이 찾아낸 해답은 감광성 물질로 퀴논 계열의 화합물을 페놀 수지로 잘 알려진 노볼락(Novolac)에 붙이는 것이었다. 노볼락 수지는 20세기 초에 이미 개발된 재료였는데, 나무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 바르는 옻칠을 대체하는 물질이었다. 이 물질의 단단함과 안정성이 민스크의 눈에 띄었다. 두 물질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붙인 다음 용매와 첨가제 등으로 조합하니 완벽한 포지티브 포토레지스트가 만들어졌다. 해상도도 1.5마이크로미터로 목표했던 3마이크로미터보다 더 우수한 성질이었다.


1959년 코닥은 KTFR(Kodak Thin Film Resist)란 이름으로 이 제품을 출시했고, 이어서 1961년에는 더 개선된 제품인 KMER(Kodak Metal Etch Resist)를 출시했다. 페어차일드, IBM,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 잘 나가는 반도체 신흥 기업들이 구매하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면서 민스크 팀이 개발한 퀴논-노볼락(DNQ-Novolac) 레지스트는 산업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반도체 칩 공정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 물질을 활용할 줄 알아야하고, 떨어지기 전에 항상 대량 구매해야 하는 필수 품목이 되었다.


2차 대전 중에 민스크는 화학 정찰 부대에 배속되어 유럽의 최전선에 근무했다. 독일군이 독가스를 무차별적으로 살포한다는 공포심이 팽배한 상태여서, 민스크의 부대는 쉴 틈없이 전선을 누비며 독가스를 탐지하고 분석해야 했다. 이 때의 경험은 민스크에게 남다른 관점을 주었다. 본인이 정밀하게 분석하지 않으면 전우들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항상 그를 옥죄었다. 실수를 하지 않기위해 그는 세밀한 사항까지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기록은 큰 자산이 되었다. 정밀한 관찰과 기록, 이것을 이기는 실험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민스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체득했다. 그리고, 이 때의 경험이 그를 최고의 반열에 올리게 했고, 문명의 발전에 한 획을 긋게 만들었다. 그의 연구로 인해 확장된 화학 반응 이론과 실험실에서 파생된 부산물들은 모두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핵심적인 소재가 되었다. 또한, 그로 인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반도체 리소그래피 공정은 현재까지도 산업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민스크는 반도체 산업을 넘어 인류 문명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과학자였다.


1960년 가을 보스턴 근교의 작은 주택가. 민스크가 한창 각광받던 이 즈음에 한 남자가 그의 차고에 마련한 작은 실험실에서 플라스크를 흔들고 있었다. 34세의 조셉 쉬플리(Jeseph N. Shipley, 1926~2008). MIT 박사 출신이면서 코닥과 함께 세계 최고의 화학 기업 듀폰(DuPont)의 엔지니어였던 그가 한 달 전에 독립한 상황이었다. 결혼을 한 상황이어서 모험을 하기에 큰 부담이었지만, 그의 처는 조용히 그의 꿈을 응원했다. 그리고, 이 작은 차고에서 수십억 달러의 사업의 시작되었다.


보스턴 항구의 선박 정비공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조선소를 드나들었던 쉬플리는 거대한 배를 칠하는 페인트에 관심을 가졌다. 다행히 그의 학교 성적은 매우 우수했고, 특히 화학 분야의 성적은 MIT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나, 그가 졸업하던 1944년은 아직 전쟁이 한참 벌어지던 중이었다. 그는 해군에 입대해 태평양 함대의 기관실에 배치받았고, 여기서 연료와 관련된 일을 담당했다. 아직 화학과 관련된 대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 속에서 화학물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체험하게 되었다.


1946년 3월, 제대한 쉬플리는 민스크처럼 제대 군인을 위한 대학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MIT 합격 통지서를 받았기에, 1946년 9월부터 그는 MIT의 화학공학과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쉬플리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매우 신중한 성격이었다. 원래 성격도 그랬지만, 전쟁에 참전해 이런저런 경험을 겪은 것이 그를 더욱 사려깊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의 신중함과 영민함은 교수들의 눈에 띄었다. 군인 장학금으로 대학은 겨우 졸업했으나, 대학원에 갈 돈이 없었던 그에게 MIT의 교수들은 전액 장학금과 약간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제안을 했고, 후에 노벨상을 받는 거장, 폴 플로리(Paul Flory) 교수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플로리 교수는 엄격하고 깐깐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고분자와 관한 이론과 실험, 양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업적을 쌓았는데, 그가 보기에 신중하면서 세밀한 쉬플리가 당시 코닥을 중심으로 떠오르는 감광성 고분자를 연구하기에 적당한 연구자라고 판단되었다. 그의 눈은 정확했다. 세계적인 학자의 지도 하에 쉬플리는 이 곳에서 수 백가지의 물질을 합성했고, 고분자의 구조와 성질의 상관관계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플로리 교수가 보기에 그는 실험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쉼없이 물질을 합성했고, 합성 과정과 합성된 물질의 성질을 세밀하게 기록해 흠잡을 데 없는 연구노트를 작성했다. 이런 성실함의 바탕이 태평양 함대의 끈적끈적한 기관실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애잔한 마음이 들었고 그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했다. 물론, 쉬플리의 연구가 발전할 수록 플로리 교수의 명성도 같이 커질 수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한 후, 불과 4년 만인 1954년 가을, 쉬플리는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최고의 대학과 최고의 교수로부터 인정을 받은 쉬플리는 자신이 골라서 취업할 수 있었고, 그의 선택은 고분자 분야의 최고 기업인 듀폰이었다. 입사 후 쉬플리는 12개의 특허를 출원했고, 여러 신제품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불과 6년 만에 거둔 성과였다. 입사할 때부터 유명했던 쉬플리는 듀폰을 넘어 관련 산업의 스타가 되고 있었다. 모두가 몇 년이 지나면 그가 듀폰 연구소의 얼굴이 될 것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1959년 봄 보스턴에서 열린 MIT 동창회에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학창 시부터 잘 알던 로버트 노이스를 만난 것이었다. 페어차일드와 인텔의 그 노이스였다. 노이스는 아직 페어차일드에 다닐 때였는데, 쉬플리는 이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똑똑하고 사려깊은 노이스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졌다. 노이스는 그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반도체 직접회로를 만들고 있어.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칩 하나에 만드는 일인데, 이게 우리의 미래라고 난 확신해!. 근데, 문제가 하나있어. 포토레지스트라는 것인데, Kodak이 독점하는 분야인데 너무 비싸고 고객 서비스가 형편없어.”


노이스의 설명에서 포토레지스터라는 말이 쉬플리의 귀를 자극했다. 코닥이 만든 포토레지스트에 대해 설명을 부탁하자, 노이스는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니라면서 대략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감광성 폴리머? 그건 내 분야인데?’


쉬플리는 노이스와 한참을 더 얘기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마음을 굳혔다. 관료적인 거대 기업에서 탈출해 자신만의 일을 꿈꾸었던 그는 이게 자신의 일이라고 믿었다. 1960년 8월, 쉬플리는 듀폰을 사직했다. 모두가 이해하지 못했다. 조만간 승진할 예정이었고, 연구소의 얼굴이 될 사람이 그만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것도 아니고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포토레지스트를 개발한다니, 이건 지나치게 용감한 결정이라는 조언이 가득했다. 그의 지도교수까지 뜯어 말렸지만, 쉬플리는 새로운 기회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꺽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쉬플리 컴퍼니(Shipley Company, Inc.)가 만들어졌다. 회사 주소는 그의 차고. 주주는 그와 그의 아내가 전부였다. 창업 자본금 $15,000에서 $3,000은 실험실 기구를 사는 데 썼고, 나머지로 매출과 이익이 날 때까지 버텨야 했다. 시간이 촉박했던 만큼 그는 모험을 하기보다 코닥의 민스크 팀이 개발한 제품을 더 정밀하고 싸게 만드는 것에 연구 중점을 두었다. 운도 좋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민스크가 그들의 신제품 포지티브 포토레시스트의 특허를 조건 없이 공개했다. 이제 누구나 이 특허를 사용할 수 있었고, 이 분야의 대가인 쉬플리는 꼼꼼하게 코닥 제품들을 분석했다.


몇 달간 절박하게 연구를 하다보니, 코닥 제품들의 빈틈이 보였다. 코닥은 대량 생산을 위해 상업용 노볼락 수지를 구매해 제품을 만들었는데, 쉬플리가 보기에 기존에 나와있는 제품들은 약간 미흡한 점이 있었다. 이게 빈틈이었다. 쉬플리는 포토레지스트에 딱 들어맞는 노볼락 수지를 직접 합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최적의 합성 조건을 맞추기 위해 수백 번이 넘는 실험을 시도했다. 실패가 반복되었지만, 성공에 조금씩 다가간다고 믿었다. 결국 해법을 찾아냈는데, 합성을 위한 용매 조합이 열쇠였다. 당시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용매를 섞고, 접착촉진제를 소량 첨가했더니 최적의 배합이 나타났다. 마침 모아 둔 돈도 다 떨어질 무렵인 1961년 3월, 코닥 제품 대비 모든 면에서 우수하거나 동등한 제품이 출시되었다. 제품명 AZ-111. AZ가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A to Z라는 소리도 있었고, 쉬플리가 좋아했던 Arizona 주를 의미한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쉬플리는 끝내 의미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1961년 4월 50ml 병 10개에 샘플을 담아 보스턴 근처의 기업들을 찾아 다녔다. 별 다른 영업은 없었다. 쉬플리는 비교적 잘 알려진 사람이었고, 자신이 직접 개발한 포토레지스트인데 코닥보다 더 좋고 더 싸다는 얘기가 다였다. 혹할만한 얘기였으나, 아무도 샘플을 사용해 보려 하지 않았다. 코닥의 제품으로 이미 공정이 최적화되었기 때문에 다른 제품의 사용이 어렵다는게 이유였다. 거절이 쌓일수록 쉬플리의 의지는 더 단단해졌다. 그러던 중 좋은 소식이 있었다. 그가 방문한 Transitron Electronics의 중국계 엔지니어인 리차드 첸(Richard Chen)이 샘플을 검증해보겠다고 한 것이었다. 쉬플리는 즉각 샘플과 데이터 시트를 준비해 첸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2주 후,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첸의 실험 결과 코닥 제품보다 더 쓸만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 더 테스트하기 위해 우선 1파인트(473ml)를 주문했다. 쉬플리 컴퍼니의 첫 주문이었다. 가격은 $30로 정했다. 코닥 제품이 $35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전략이었다. 첸은 쉬플리에게 천사같은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주위 동료들에게 전파했고, 소문은 금새 퍼져나갔다. 주문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설비를 증설하고 직원을 뽑아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회사는 무럭무럭 커나갔다. 1961년 말이 되면 매출이 $8,000까지 늘어났고, 드디어 페어차일드의 노이스에게도 제품을 소개했다. 페어차일드와 거래가 성사된 후에는 모든 게 달라졌다. 당대의 대기업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IBM 등도 주문을 넣었고, 1963년에는 매출이 $18,000까지 증가했다. 기업은 성장했으나, 쉬플리는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반도체 칩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질수록 연구개발을 늦춰서는 안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칩 패터은 계속 정밀해지고 있기에, 포토레지스트도 더 개선된 제품이 필요했다. 패턴 작업이 늘어나면서 포토레지스트 사용량도 같이 늘었기에, 칩 제조사들은 가격 인하를 강하게 요구했다. 더 싸지만 더 정밀한 고분자 물질. 이게 쉬플리가 가야할 길이었다.


첫 제품 후 약 4년간 그는 5명의 연구팀과 함께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후에 공개된 그의 실험 노트를 보면 말 그대로 수천 번의 실험 과정과 결과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해상도와 빛의 감도를 높이고, 빛을 쪼인 부분만 깔끔하게 제거되는 선택적 식각비도 고려해야 했다. 원래도 감광성 고분자의 전문가였으나, 이 실험 과정을 통해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이론과 실험 지식을 갖춘 대가가 되어갔다.


1966년 1월, 쉬플리 컴퍼니는 AZ-1350이라는, 반도체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신제품을 출시했다. 이번에도 제품의 이름에 대한 설명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1350번째 실험이 성공했기에 붙인 이름이라고 추측했다. 그만큼 많은 실험이 이뤄졌다. 신제품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모든 칩 제조사들이 이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섰고, 이후의 리소그래피 공정은 이 제품을 기준으로 표준화되었다. 1970년 쉬플리의 시장 점유율은 35%로 코닥의 50%보다는 못 했지만, 1975년은 45%로 35%의 코닥을 추월했다. 코닥도 정신을 차리고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시장을 방어하려 노력했지만, 쉬플리가 직접 발로 뛰면서 고객들의 애로사항을 처리하는 밀착 서비스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이후부터는 쉬플리의 전성기였다. 그들은 꾸준하게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고객들의 요구사항을 최대한 반영했고, 가격 면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했다. 그의 이런 헌신은 인텔의 주역, 노이스와 무어에게 큰 감동을 전달했다. 노이스야 대학 때부터 친구였고, 쉬플리가 창업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지만, 화학을 전공한 무어는 쉬플리의 연구가 얼마나 집요하고 대단한 것인지 공감할 수 있었다. 무어는 종종 쉬플리가 없었다면 실리콘 밸리도 없었을 거라는 말을 하곤 했다.


이후에 쉬플리 컴퍼니는 일본의 화학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기술을 개발했으나, 1990년대 들어서는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2001년 롬앤하스(Rohm and Hass)가 거액을 주고 쉬플리를 인수했고, 2008년 다우 케이컬(Dow Chemical)이 롬앤하스를 인수한 후 2019년 듀폰과 다우가 회사를 병합하고 분할하면서 포토레지스트 사업부는 듀폰으로 이관되었다. 창창한 듀폰의 자리를 뿌리치고 창업했던 쉬플리를 이력을 생각한다면, 그의 사업부가 마지막에 듀폰으로 이관되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면이 있었다.


쉬플리는 2001년 회사를 매각하면서 정말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돈보다 꿈을 쫗았던 자신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가장 뿌듯하게 생각했다. 쉬플리의 진짜 업적은 반도체 산업의 중심을 발명에서 재현으로 이동시킨 점이다. 그는 아이디어보다는 공정을, 천재보다는 시스템을, 번뜩이는 영감보다는 정확한 반복을 선호했다. 그는 자신의 후배들에게


“산업은 아이디어로 시작하지만, 반복으로 완성된다.”


는 말을 강조했다. 기술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후에 미국보다 일본 기업으로 전파되어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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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크와 쉬플리로 대표되는 포토레지스트의 개발자들은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어떤 설계도 반도체 기판 위에 존재할 수 없었다. 빛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디서 녹고 어디서 남을지, 그 선택을 한 사람들은 회로를 그린 것이 아니라 회로가 가능해지는 세계를 설계했다. 그리고, 그 치열한 혁신의 경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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