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ipmen: 반도체 산업을 창조한 천재들의 이야기
2010년,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한 교수 연구실. 데이비드 패터슨(David Patterson)과 크리스테 아사노비치(Krste Asanović)는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프로세서 명령어 집합 아키텍처(Instruction Set Architecture, ISA)를 설계하고 있었다. 이들이 만든 RISC-V(리스크 파이브)는 단순히 또 하나의 기술적 실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도체 산업의 권력 구조에 도전하는 철학적 선언이었다.
반도체 산업은 오랫동안 폐쇄성으로 특징지어져 왔다. 인텔의 x86, ARM의 ARM 아키텍처처럼 주요 ISA, 즉 반도체 설계 규격은 모두 독점적이었고, 사용하려면 막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RISC-V는 달랐다. 이것은 완전히 개방되고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ISA였다. 누구나 RISC-V 기반 칩을 설계하고 제조하고 판매할 수 있었다. 로열티도, 라이선스 협상도 필요 없었다.
이 장에서는 RISC-V의 탄생과 성장을 통해 오픈소스 하드웨어 운동이 어떻게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지 살펴본다. 주요 인물들의 비전과 철학, 그들이 직면한 도전, 그리고 글로벌 커뮤니티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 이 혁신의 의미를 탐구한다.
데이비드 패터슨은 컴퓨터 아키텍처 분야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977년 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버클리에 합류한 그는, 1980년대 초 RISC(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r) 아키텍처 혁명을 주도했다. 당시 대부분의 프로세서는 CISC(Complex Instruction Set Computer)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수백 개의 복잡한 명령어들을 하드웨어에 구현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패터슨과 그의 동료들은 역설적인 발견을 했다. 컴파일러가 실제로 사용하는 명령어는 소수에 불과했고, 복잡한 명령어들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간단한 명령어 세트로 프로세서를 설계하면 더 빠르고 효율적인 칩을 만들 수 있었다. 1981년 버클리 RISC 프로젝트는 이 아이디어를 증명했고, 곧 스탠퍼드의 MIPS, IBM의 801 등 다른 RISC 프로젝트들이 뒤를 이었다.
RISC 철학은 프로세서 설계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ARM, MIPS, SPARC, PowerPC 등 현대의 주요 아키텍처 대부분이 RISC 원칙을 따른다. 패터슨은 이 공로로 2017년 존 헤네시(John Hennessy)와 함께 튜링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는 또 다른 꿈이 있었다.
패터슨은 동료 교수 크리스테 아사노비치와 이 문제를 논의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 우리는 개방적이고 단순한 ISA를 가지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은 자연스러웠다. 소프트웨어 세계에서는 리눅스, 아파치, 파이썬 같은 오픈소스 프로젝트들이 산업을 혁신하고 있었다. 하드웨어도 같은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서 RISC-V가 태어났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교육 목적이었다.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완전한 프로세서를 설계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면서도, 실제 응용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ISA. 그것이 목표였다.
크리스테 아사노비치는 버클리의 교수로, 병렬 컴퓨팅과 벡터 프로세서 전문가였다.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고성능 컴퓨팅 시스템 설계에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패터슨과 아사노비치는 2010년 여름, 같은 연구실의 이윤섭과 함께 RISC-V의 첫 버전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윤섭은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온 재능 있는 학생이었다. 그는 프로세서 설계에 열정이 있었고, 이 프로젝트에 완전히 몰입했다. 세 사람은 과거 RISC 설계의 교훈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단순하고 우아한 ISA를 만들고자 했다.
놀랍게도 RISC-V의 기본 명령어 집합(RV32I)은 단 47개의 명령어로 구성되었다. x86의 수천 개, ARM의 수백 개와 비교하면 극도로 단순했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야말로 RISC-V의 핵심 철학이었다. 기본은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필요한 기능은 선택적 확장(extension)으로 추가하는 모듈식 설계였다.
2011년 5월, RISC-V의 첫 사양서가 공개되었다. 이것은 BSD 라이선스로 배포되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고, 수정하고, 배포할 수 있었다. 특허 제약도 없었다. 반도체 산업에서 이런 개방성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설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누군가 실제로 작동하는 RISC-V 프로세서를 만들어야 했다. 이 역할을 맡은 사람이 대학원생 앤드루 워터만(Andrew Waterman)이었다. 워터만은 뛰어난 하드웨어 설계자였을 뿐만 아니라, 시스템 소프트웨어에도 정통했다.
워터만은 Chisel이라는 하드웨어 설계 언어를 사용해 RISC-V 프로세서를 구현했다. Chisel은 스칼라(Scala) 기반의 오픈소스 언어로, 전통적인 Verilog나 VHDL보다 훨씬 생산성이 높았다. 그는 Rocket이라는 이름의 RISC-V 코어를 만들었고, 이것은 곧 오픈소스로 공개되었다.
워터만은 또한 RISC-V용 도구 체인(toolchain) 개발을 주도했다. GCC와 LLVM 컴파일러, GNU 바이너리 유틸리티, 디버거 등을 RISC-V에 포팅했다. 리눅스 커널도 RISC-V에서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없었다면 RISC-V는 단지 종이 위의 설계로 끝났을 것이다.
워터만의 작업은 RISC-V가 단순한 학술 프로젝트에서 실용적인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나중에 SiFive의 공동 창업자가 되어 RISC-V의 상용화를 이끌게 된다.
2015년까지 RISC-V는 주로 학계에서 주목받았다. 전 세계 수십 개 대학에서 RISC-V를 교육과 연구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업계는 여전히 관망하는 분위기였다. 오픈소스 하드웨어가 정말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표준화와 거버넌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적재산권 문제는 없는가?
이런 우려를 해소하고 RISC-V를 산업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2015년 8월 RISC-V 재단(RISC-V Foundation)이 설립되었다. 창립 멤버로는 버클리 외에 구글, HP, 오라클, 엔비디아, 퀄컴, 삼성, 웨스턴디지털 등 40여 개 기업과 기관이 참여했다. 이것은 RISC-V가 단순한 학술 프로젝트에서 글로벌 산업 표준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었다.
재단은 비영리 조직으로, RISC-V 규격의 개발과 관리, 호환성 인증, 교육 및 홍보 등을 담당했다. 중요한 것은 RISC-V ISA 자체는 재단이 아닌 모든 사람의 것으로 남았다는 점이다. 재단은 표준을 관리하되, 독점하지 않았다.
오코너는 RISC-V의 잠재력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는 RISC-V를 단순히 '무료 ISA'로 홍보하는 것을 넘어, 혁신과 협력의 플랫폼으로 포지셔닝했다. 그의 전략은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기술 완성도 향상이었다. 오코너는 RISC-V 명세가 단순히 교육용이 아니라 최첨단 상업 제품에 사용될 수 있을 만큼 견고해야 한다고 믿었다. 재단은 다양한 워킹 그룹을 조직해 벡터 확장, 암호화 확장, 하이퍼바이저 지원 등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는 수백 명의 엔지니어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했다.
둘째, 생태계 구축이었다. 하드웨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코너는 소프트웨어, 도구, 교육 자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재단은 컴파일러, 운영체제, 개발 보드, 온라인 강좌 등을 지원했다. 또한 전 세계에서 RISC-V 서밋(summit)을 개최해 커뮤니티를 연결했다.
셋째, 정치적 중립성이었다. 반도체 산업은 점점 더 지정학적 갈등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미중 무역 전쟁,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많은 국가들이 기술 주권을 추구했다. 오코너는 RISC-V를 어느 한 국가나 기업에 종속되지 않는 진정한 글로벌 표준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나중에 재단이 스위스로 본부를 이전하는 결정으로 이어진다.
오픈소스 ISA를 가지는 것과 실제 비즈니스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2015년, 버클리의 RISC-V 프로젝트에서 일하던 세 사람이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크리스테 아사노비치, 이윤섭, 그리고 앤드루 워터만이 SiFive라는 회사를 창업한 것이다.
하지만 기술 창업자들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에게는 비즈니스 리더가 필요했다.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나비프 달랄(Naveed Sherwani)이었다. 달랄은 반도체 IP와 EDA(전자설계자동화) 산업의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스타트업을 성공시킨 경험이 있었고, 특히 Open Silicon이라는 회사에서 맞춤형 칩 설계 사업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달랄은 SiFive의 CEO가 되어 회사의 비즈니스 전략을 수립했다. SiFive의 모델은 독특했다. 그들은 RISC-V 프로세서 IP를 판매했지만, ISA 자체에 대한 로열티는 받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설계한 구체적인 프로세서 코어(예: E, S, U 시리즈)에 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받았다. 고객들은 이 코어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자신의 필요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었다.
더 혁신적인 것은 클라우드 기반 칩 설계 플랫폼이었다. 전통적으로 맞춤형 칩을 설계하려면 고가의 EDA 도구와 전문 인력이 필요했다. SiFive는 온라인에서 간단한 인터페이스로 자신만의 RISC-V 프로세서를 구성하고 제조까지 의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것은 칩 설계의 민주화였다.
첫째, 비용 절감이었다. ARM 코어를 사용하려면 수백만 달러의 선불 라이선스 비용과 제품 판매량에 따른 로열티를 지불해야 했다. RISC-V는 이런 비용 부담이 없었다. 특히 저가 IoT 기기나 실험적 프로젝트에서 이 차이는 컸다.
둘째, 맞춤화 유연성이었다. ARM은 표준화된 코어를 제공했지만, 내부를 수정하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RISC-V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특수한 응용을 위해 명령어를 추가하거나 최적화할 수 있었다. 이것은 AI 가속기, 보안 프로세서, 항공우주 등 특수 분야에서 큰 이점이었다.
셋째, 기술 주권이었다. 미중 무역 전쟁이 격화되면서 중국 기업들은 미국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 했다. RISC-V는 어느 한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중립적 기술이었다. 중국은 RISC-V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알리바바, 화웨이 등이 RISC-V 칩 개발에 투자했다.
SiFive는 빠르게 성장했다. 2018년까지 여러 차례 투자를 유치해 총 1억 2천만 달러 이상을 조달했다. 고객사도 늘어나 웨스턴디지털, 엔비디아, 구글 등 주요 기업들이 SiFive의 기술을 채택했다. 2020년에는 인텔이 SiFive 인수를 타진했다는 보도도 있었다(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RISC-V가 진정한 글로벌 운동이 된 것은 중국 커뮤니티의 열정적 참여 덕분이었다. 중국과학원 소속 연구자 바오윈강(包云岗, Bao Yungang)은 RISC-V의 초기 전도사였다. 그는 RISC-V의 개방성이 중국의 프로세서 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중국은 오랫동안 프로세서 기술에서 서구에 의존해왔다. 자체 개발한 Loongson(龙芯) 같은 프로세서도 있었지만, MIPS나 ARM 같은 해외 ISA 기반이었고 생태계도 제한적이었다. RISC-V는 달랐다.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중국 기업과 연구기관들이 자유롭게 혁신할 수 있었다.
바오윈강은 중국과학원 소프트웨어연구소에 PLCT(Programming Language & Compiler Technology) 랩을 설립하고, RISC-V를 위한 소프트웨어 도구와 컴파일러 개발을 주도했다. 그의 팀은 RISC-V 커뮤니티에 수많은 기여를 했고, 특히 중국어 문서화와 교육 자료 제작에 힘썼다.
2018년, 중국에서 RISC-V 산업 연합(China RISC-V Industry Alliance)이 출범했다. 알리바바는 Xuantie(玄铁) 시리즈 RISC-V 프로세서를 개발했고, 이를 오픈소스로 공개했다. 화웨이는 IoT 기기용 RISC-V 칩을 개발했다. 중국 정부도 RISC-V를 전략 기술로 지정하고 지원했다.
흥미롭게도 중국의 참여는 정치적 긴장에도 불구하고 RISC-V 커뮤니티의 국제적 협력을 강화시켰다. 미국, 유럽, 중국, 인도의 엔지니어들이 함께 기술 표준을 개발하는 것은 분단된 세계에서 보기 드문 협력의 사례였다.
유럽도 RISC-V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독일 뮌헨 공과대학의 프랭크 K. 구르크만(Frank K. Gürkaynak) 교수는 유럽의 RISC-V 연구를 이끄는 핵심 인물이었다. 스위스 ETH 취리히에서도 일했던 그는 저전력 RISC-V 프로세서 설계 전문가였다.
구르크만의 팀은 Pulpino와 Pulp(Parallel Ultra-Low-Power) 플랫폼을 개발했다. 이것은 초저전력 IoT와 웨어러블 기기를 위한 RISC-V 기반 멀티코어 시스템이었다. 모든 설계가 오픈소스로 공개되어 전 세계 연구자들이 사용할 수 있었다.
유럽연합은 2020년 'European Processor Initiative'를 출범시켰다. 이것은 유럽 슈퍼컴퓨터를 위한 자체 프로세서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로, RISC-V가 핵심 기술로 채택되었다. 유럽은 미국과 중국의 프로세서에 의존하지 않고 기술 주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RISC-V를 선택했다.
2020년, RISC-V 재단은 본부를 미국에서 스위스로 이전했다. 이것은 상징적인 결정이었다. 릭 오코너는 "RISC-V는 어느 한 국가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위스의 정치적 중립성은 RISC-V의 글로벌 비전과 잘 맞았다.
RISC-V는 개발도상국에도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 인도는 특히 적극적이었다. 인도 전자정보기술부(MeitY)는 'Shakti'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이것은 인도 공과대학(IIT) 마드라스 캠퍼스에서 주도한 RISC-V 프로세서 개발 프로젝트였다.
Shakti 프로젝트의 리더 카마카난(Kamakoti V)은 RISC-V가 인도의 반도체 산업에 도약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과거 인도는 프로세서 기술에서 선진국에 뒤처져 있었고, 값비싼 라이선스 비용이 장벽이었다. RISC-V는 이 장벽을 제거했다. Shakti는 여러 RISC-V 코어를 개발했고, 일부는 실제 칩으로 제조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교육적 효과였다. 수백 명의 인도 학생들이 Shakti 프로젝트를 통해 프로세서 설계를 배웠다. 오픈소스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실제 상업용 프로세서의 모든 세부사항을 들여다보고 실험할 수 있었다.
비슷한 움직임이 브라질, 대만, 한국, 러시아 등 전 세계에서 일어났다. RISC-V는 프로세서 기술을 소수 선진국의 전유물에서 글로벌 공공재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RISC-V 운동의 근간에는 깊은 철학적 신념이 있다. 그것은 기술의 개방성이 혁신을 가속화하고, 사회적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믿음이다. 데이비드 패터슨은 이를 명확히 표현했다. "기술은 모두의 것이어야 합니다. 소수의 기업이 독점하는 순간, 혁신은 느려지고 진입장벽은 높아집니다."
이것은 소프트웨어 오픈소스 운동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리누스 토르발스가 리눅스를 오픈소스로 공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 수천 명의 개발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리눅스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운영체제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안드로이드 폰, 슈퍼컴퓨터, 클라우드 서버 대부분이 리눅스로 작동한다.
RISC-V는 이 모델을 하드웨어에 적용한 것이다. 반도체 설계 매뉴얼을 개방함으로써 누구나 프로세서를 설계하고 개선할 수 있게 되었다. 버그는 더 빨리 발견되고 수정된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즉시 시험되고 공유된다. 교육과 연구는 훨씬 수월해진다.
크리스테 아사노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프로세서 설계를 민주화하고 싶었습니다. 소수의 엘리트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배우고 실험하고 기여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오픈소스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와 다른 도전에 직면한다. 소프트웨어는 복제와 배포 비용이 거의 없지만, 하드웨어는 제조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 오픈소스 칩으로 어떻게 수익을 창출할 것인가?
SiFive는 하나의 답을 제시했다. ISA는 무료로 제공하되, 구체적인 설계와 서비스로 수익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레드햇이 리눅스로 돈을 버는 방식과 유사하다. 레드햇은 리눅스 자체를 팔지 않고, 엔터프라이즈 지원과 통합 솔루션을 판다.
또 다른 모델은 '오픈소스 코어 + 독점 확장'이다. 많은 기업들이 RISC-V의 기본 ISA는 그대로 사용하되, 특수한 가속기나 보안 기능은 독점적으로 추가한다. 예를 들어 구글의 Titan 보안 칩은 RISC-V 기반이지만, 내부 세부사항은 공개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오픈소스 정신에 어긋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RISC-V 지지자들은 실용적 태도를 취한다. 완벽한 개방보다는 부분적 개방이라도 독점보다 낫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ISA라는 기반 계층이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다.
개방성의 또 다른 도전은 단편화(fragmentation)다. 누구나 자유롭게 RISC-V를 수정할 수 있다면, 서로 호환되지 않는 수많은 변종이 생겨나지 않을까? 이것은 안드로이드가 겪은 문제이기도 했다.
RISC-V 재단은 이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재단은 '호환성 프로그램'을 만들어 RISC-V 구현이 표준을 준수하는지 인증한다. 인증을 받은 제품만 RISC-V 상표를 사용할 수 있다. 또한 표준 확장은 엄격한 검토 과정을 거쳐 승인된다.
이것은 미묘한 균형이다. 너무 엄격하면 혁신이 저해되고, 너무 느슨하면 혼란이 생긴다. 릭 오코너는 "우리의 목표는 통제가 아니라 조율입니다. 우리는 다양성을 환영하되, 상호운용성을 보장하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2024년 현재, RISC-V는 더 이상 실험적 기술이 아니다. 수십억 개의 RISC-V 칩이 이미 생산되었고, 주로 마이크로컨트롤러와 IoT 기기에 사용되고 있다. 웨스턴디지털은 자사의 모든 제품에 RISC-V를 통합하겠다고 선언했다. 엔비디아는 GPU의 제어 프로세서로 RISC-V를 채택했다.
더 야심찬 프로젝트들도 진행 중이다. 벤투리(Ventana)와 SiFive는 데이터센터급 고성능 RISC-V 프로세서를 개발하고 있다. 이들은 ARM의 Neoverse나 인텔의 제온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을 목표로 한다. 유럽의 슈퍼컴퓨터 프로젝트도 RISC-V 기반이다.
소프트웨어 생태계도 성숙해지고 있다. 구글 안드로이드가 RISC-V를 공식 지원하기 시작했다. 주요 리눅스 배포판들도 RISC-V 버전을 제공한다. 자바, 파이썬, 러스트 같은 인기 언어들이 RISC-V에서 원활하게 작동한다.
이것은 RISC-V 창시자들의 원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본다. 데이비드 패터슨은 "기술이 정치적 무기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RISC-V가 모든 국가에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RISC-V의 진정한 잠재력은 특수 목적 프로세서에 있을지도 모른다. AI 가속기, 암호화 프로세서, 네트워크 프로세서, 센서 허브 등 특정 작업에 최적화된 칩들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칩들은 각기 독특한 요구사항을 가지며, 표준 ISA로는 최적화가 어렵다.
RISC-V의 모듈식 설계는 이런 응용에 완벽하다. 기본 ISA에 필요한 확장만 추가하면 된다. 예를 들어 AI 칩이라면 벡터 연산이나 행렬 곱셈 명령어를 추가할 수 있다. 암호화 칩이라면 AES나 SHA 명령어를 넣을 수 있다.
구글, 테슬라, 애플 같은 기업들이 자체 칩을 설계하는 추세도 RISC-V에 유리하다. 이들은 범용 칩보다 자사 응용에 최적화된 맞춤형 칩을 원한다. RISC-V는 이런 맞춤화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표준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활용할 수 있게 한다.
RISC-V의 이야기는 기술 그 이상이다. 이것은 협력과 개방성의 힘에 관한 이야기다. 데이비드 패터슨, 크리스테 아사노비치, 그리고 이윤섭이 2010년 버클리 연구실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는 10여 년 만에 글로벌 운동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70개국 이상에서 3,000개 이상의 조직이 RISC-V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증명한 것은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처럼 개방되고 협력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독점과 폐쇄성이 지배하던 반도체 산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누구나 프로세서를 설계하고, 학습하고, 혁신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
물론 도전은 계속된다. RISC-V가 ARM이나 x86을 완전히 대체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생태계의 성숙도, 성능, 단편화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하지만 이미 RISC-V는 산업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RISC-V는 ARM에게 압박을 주어 더 유연한 라이선싱 정책을 채택하게 만들었다. 인텔도 x86의 폐쇄성을 재고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RISC-V는 프로세서가 소수 기업의 독점물이 아니라 글로벌 공공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릭 오코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단지 새로운 ISA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도체 산업이 작동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협력이 경쟁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RISC-V를 반도체 산업의 전환점으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독점에서 개방으로, 폐쇄에서 협력으로, 분단에서 통합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의 상징으로. 그것이 데이비드 패터슨과 그의 동료들이 꿈꾸던 미래다.
반도체는 현대 문명의 기반이다. 그 기반이 개방되고 민주화될 때, 우리는 더 혁신적이고 공정하며 포용적인 기술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RISC-V는 그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어떤 오픈소스 하드웨어 혁명이 이어질지, 향후 10년 내에 그 결과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는 곳은 여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