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쇼클리의 실험실

천재 물리학자 쇼클리의 집착과 권위주의, 그리고 그에 반발한 젊은 과학자

by JBO

윌리엄 쇼클리(William B. Shockley)는 트랜지스터의 공동 발명자이자, 실리콘 밸리의 ‘신화적 개척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의 생애와 행보는 실리콘 밸리의 기술적 기원, 기업가정신의 탄생, 그리고 과학자의 정치적•윤리적 책임 문제까지 모두 압축하고 있어, 반도체 및 IC 칩의 역사와 사회학을 분석할 때 반드시 짚어야 할 핵심 인물이다. 그러나, 쇼클리의 시대와 칩의 발견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자기기의 시대적 흐름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이클 페러데이부터 시작되는 이 흐름은 쇼클리 전까지 100년 이상의 긴 이야기이지만, 현대 문명의 기원을 짚어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페러데이부터 쇼클리까지

1831년 영국 런던 왕립연구소의 지하 실험실. 마이클 페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는 구리선을 둘둘 만 코일과 자석을 들고 또 다른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40세의 이 과학자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제본공의 아들이었지만, 누구보다 깊은 열정과 근면함으로 자연의 가장 깊은 비밀을 캐내고 있었다.


그는 자석을 코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연결된 검류계의 바늘이 움직였다. 자석을 빼내자, 바늘이 반대 방향으로 흔들렸다.


“전류가 흐른다!”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과학이 좋아 실험실의 반복된 일과를 묵묵히 견뎌냈던 한 천재의 위대한 발견이었다. 동시에, 인류 문명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패러데이는 움직이는 자기장이 전류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했고, 그의 실험을 거창한 물리 수식이 아니라 그림으로 표현했다. 아마도, 물리 수식을 유도할만한 수학적 역량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떠올랐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인간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수많은 선들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고,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실험적 증명은 있지만, 그럴싸한 물리 공식이 없는 발견에 대해 일부 과학자들은 폄하하기 바빴다. “수학적으로 풀어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지만, 페러데이는 확신했다. “전기는 물질이 아니라 흐름이다.” 이 직관은 후에 완벽하게 수학적으로 설명되었다. 그리고, 이 직관이 전자 산업과 칩 혁명의 시작이었다.


시간이 흘러, 1873년 스코틀랜드 시골의 저택. 페러데이가 전자기 유도현상을 발견한 해에 태어난 제임스 맥스웰(James C. Maxwell, 1831~1879)은 페러데이의 실험 노트를 읽으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페러데이는 위대한 실험가였지만, 수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장(Field)’ 개념은 직관적이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고민의 시간이 지난 후에 맥스웰은 펜을 들고, 4개의 방정식을 고안했다. 그리고, 이 4개의 방정식들은 전기와 자기에 대한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페러데이가 반쯤 열어젖힌 새로운 문명의 문이 맥스웰에 의해 활짝 열리게 된 순간이었다. 이 방정식에 의하면, 전기장과 자기장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공간을 통해 전파된다. 그리고, 이 속도는 빛의 속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맥스웰은 그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빛은 전자기파다!”


1879년, 48세의 젊은 나이에 맥스웰이 세상을 떠났을 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여전히 그의 이론과 패러데이의 실험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8년 후인 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R. Hertz, 1857~1894)가 맥스웰 방정식의 전자기파 가설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페러데이의 직관과 맥스웰의 정리가 드디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전자기학은 무섭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무선 통신이 등장해 전자기학의 응용 분야가 얼마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1897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 J.J.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은 음극선관 실험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진공관 속에서 무언가가 음극에서 양극으로 흘러갔다. 그것은 무엇인가? 톰슨은 진공관에 자석을 갖다 대 자기장을 만들었다. 그러자 광선이 휘는게 보였다. 전기장을 걸자, 또 휘어졌다. 휘는 정도를 측정해 계산해 보니, 이 입자의 질량과 전하량을 구할 수 있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 입자는 가장 작은 원자로 알려진 수소 원자보다 1,800배나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확신이 생겨났다. 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그것을 “전자(electron)”라고 불렀다. 불과 몇 십년 전에 원자는 자연에서 가장 작은 입자,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라는 이론이 발표되었는데, 톰슨의 실험은 이 이론의 수정을 요구한 셈이었다. 물질은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패러데이가 발견한 전기는 이 작은 입자들의 흐름이었다. 19세기 말에 발견된 전자는 20세기 물리학의 문을 열였고, 동시에 반도체의 문도 함께 열었다.


1904년 영국 런던의 한 실험실. 존 앰브로즈 플레밍(John Ambrose Fleming, 1849~1945)은 에디슨 효과를 연구하고 있었다. 미국의 떠벌이 발명가인 토마스 에디슨(Thomas A. Edison, 1847~1931)이 1880년에 발견한 기묘한 현상, 가열된 필라멘트가 진공 속에서 전류를 방출하는 것을 재현하고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플레밍은 새로운 장치를 만들었다. 진공관 안에 성질이 다른 철판 두 개를 설치하고, 하나의 철판을 가열할 수 있는 장치였다. 후에 ‘다이오드(Diode)’라고 부르게 된 이 장치는 전류를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했다. 양방향으로 흐르는 교류 전류를 한 방향으로 흐르는 직류로 변환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3년 후 미국의 리드 포레스트(Lee de Forest, 1873~1861)는 철판을 하나 더해 3극 진공관, 즉 ‘트라이오드(Triode)’를 발명했다. 작은 신호를 3번째 철판에 흘리면, 큰 전류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된 것이다. 이 두 전자 부품을 조합하면, 장거리 전화와 라디오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이제 드디어 전자 제품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진공관 부품은 커다란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크고, 뜨겁고, 깨지기 쉬웠다. 엄청난 전력을 소비했고, 무엇보다 고장이 자주 났다. 전자 제품 산업이 발전해, 사람들이 라디오를 사게 하려면, 진공관을 대체할 새로운 부품이 필요했다.


1920년대 유럽의 물리학계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에르빈 슈뢰딩거 등의 젊은 과학자들이 굳건해 보이던 고전 물리학을 해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작업은 새로운 대안 물리학을 제시했는데,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라고 불리게 된 분야이다. 양자역학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물질의 근간을 이루는 원자와 전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이었다. 젊은 과학자들은 물리 방정식에 확률 함수를 포함시키는 등 기존 과학자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을 시도했다. 이들의 시도가 얼마나 대담했던지, 물리학의 최고봉인 아인슈타인조차 이들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실험은 양자역학이 옳다는 것을 계속 증명했고, 언제나 그렇듯, 실험의 결과는 개인의 신념보다 더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역학 방정식들은 반도체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나무와 돌 같은 고체 물질을 이해하기 위한 반복적인 실험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해하고, 예측해야 써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드디어 커다란 행성부터 원자와 전자의 움직임까지 이해하게 된 물리학자들에게 남은 숙제는 이런 것이었다. 왜 어떤 물질은 전기를 잘 통하고(도체), 어떤 것은 통하지 않을까(부도체)?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어정쩡한 물질들은 무엇인가?


펠릭스 블로흐, 앨런 위슨, 루돌프 파이어스 등은 양자역할을 고체에 적용했다. 그리고, 하나의 이론을 정리했는데, ‘밴드 이론(band theory)’라는 것이었다. 고체 속 전자들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원자들의 규칙적인 배열이 전자들을 특정 에너지 ‘밴드’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밴드는 전자로 가득차 있고, 어떤 밴드는 비어있다. 두 밴드 사이에는 일정한 에너지 간극이 있는데, 이 간극이 없으면 도체(구리, 금, 알루미늄 등), 아주 크면 부도체(유리, 고무, 세라믹 등), 그리고 적당하면 반도체(실리콘, 게르마늄 등)가 되는 모형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복잡해 보이던 고체 물질의 전기적 성질이 상당히 깔끔해지게 되었다. 도체와 부도체는 확실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적용이 가능했다. 전기를 통해야 하는 물체엔 도체를, 절연해야 하는 물체엔 부도체를 사용하면 되었다. 그러나, 반도체는 좀 다른데, 순수한 상태에서는 부도체처럼 행동하지만, 온도를 높이거나 불순물을 첨가하면 도체처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이런 반도체의 성질을 잘 만 이용하면 진공관 부품을 대체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도출되기 시작했다.


1938년, 미국 뉴저지에 있는 벨 전화회사 연구소. 책임 연구원이었던 머빈 캘리(Mervin J. Kelly, 1894~1971)는 커다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전화망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통화의 수요는 점점 높아져 수백만 명의 가입자가 생겨났다. 하지만, 진공관 증폭기는 한계에 다다렀다. 너무 많은 전력을 소비하고, 너무 자주 고장이 났기 때문이었다. 전국에 수천 개의 중개소가 필요했고, 각 중개소에는 수백 개의 진공관이 있었기에 문제없이 관리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작고, 안정적이고, 적은 전력을 소비하는 증폭 소자. 진공관을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가 개발되지 않는다면 문제는 점점 더 커질 것이고, 캘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런 소자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부터 과학자들은 실리콘과 게르마늄의 이상한 특성을 연구했고, 이를 응용하면 뭔가 엄청난 발견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아무도 실용적인 소자를 만들지는 못했다.


캘리는 결단을 내렸다. '최고의 팀을 구성하자.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들, 최고의 실험 물리학자들, 그리고 최고의 화학자들.' 그는 이 팀의 구성원들에게 무제한의 예산과 연구 자유를 보장했다. 미션은 단 하나였다. “진공관을 대체하라”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전쟁 기간 동안 레이더 개발에 참여했던, 35세의 물리학자가 드디어 벨 연구소로 돌아오게 되었다. 윌리엄 쇼클리(William B. Shockley, 1910~1989)였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지만,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쇼클리는 당대 최고의 고체물리학자이었다. 전쟁 전부터 반도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제 비로소 자신의 재능을 폭발시킬 기회를 잡게 되었다. 머빈 캘리는 그의 재능을 처음부터 알아봤고, 그를 고체물리학 팀의 리더로 임명했다. 쇼클리는 팀을 구성할 권리를 부여받았는데, 매우 신중하게 팀원들을 선발했다. 마법같은 손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실험의 마법사로 불리던 월터 브래튼(Walter H. Brattain, 1902~1987)과 이론 물리학의 거장으로 인정받던 존 바딘(John Bardeen, 1908~1991)이 팀에 합류했다.


쇼클리의 아이디어는 대담했지만, 놀랄만큼 간단했다. 반도체 표면에 전기장을 걸어서 그 안의 전류를 제어하는,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filed-effect transistor)’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바딘과 쇼클리의 반복된 검증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서, 브래튼은 수없이 많은 실험을 반복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무엇이 잘 못된 것일까? 몇 달 동안의 고민 끝에 바딘이 답을 찾아냈다. 반도체 표면에는 규칙적인 배열이 끊어지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전자들이 갇혀서 외부 전기장을 차폐해버린 것이었다. 쇼클리의 아이디어는 작동하지 않았지만, 그는 다른 프로젝트로 너무 바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오직 브래튼과 바딘만이 실험과 분석을 반복하면서 답을 찾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브래튼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표면을 통해 전류를 제어할 수 없다면, 직접 주입하면 어떨까?” 그는 게르마늄 결정 표면에 두 개의 금속 접촉점을 만들었다. 플라스틱 조각에 금박을 붙이고, 면도날로 아주 가까이 잘라서 두 개의 접점을 유지했다. 접점 사이의 거리는 불과 0.05mm. 마법의 손인 브래튼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장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 접점에 작은 전류를 흘려봤다. 동시에 다른 접점에서 나오는 전류를 측정했다. 증폭되었다! 작은 입력 전류가 큰 출력 전류를 만들었다. 증폭률이 무려 100배에 달했다. 이제 진공관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은 전자 부품,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트랜지스터의 시대가 출발 준비를 마친 셈이었다. 1947년 12월 23일 화요일 오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인류의 손에 축복이 내렸다.


하지만, 쇼클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가 실험실로 돌아왔을 때, 브래튼과 바딘은 이미 발명을 완성했다. 쇼클리는 축하했지만, 속으로는 불타는 분노를 느꼈다. “이것은 내 프로젝트였어. 내가 시작했고, 내가 팀을 만들었어. 그런데 정작 영광은 그들이 가져가는 건가?” 그날 밤 쇼클리는 새로운 발견에 대한 흥분과 질투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브래튼과 바딘의 ‘점접촉 트랜지스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 소자는 작동했지만, 상당히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현성이 낮았고, 따라서 대량 생산은 불가능했다. 조금만 더 실험하면 더 나은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 한 달 동안 쇼클리는 휴가도 반납하고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새로운 설계를 구상했다. 점접촉이 아닌 접합(junction) 방식 트랜지스터. 두 종류의 반도체를 샌드위치처럼 쌓는 것. 전자가 많은 반도체(N형)와 부족한 반도체(P형)을 교차해 PNP 혹은 NPN 방식의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불과 한 달의 기간이었지만, 브래튼과 바딘의 아이디어에 기반해 새로운 설계가 이어지니 완벽한 트랜지스터가 탄생했다. 안정적이고, 재현 가능하고, 대량 생산도 가능한, 무엇보다 브래튼과 바딘을 눌러버릴 수 있는 새로운 소자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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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간의 개선을 거쳐 1948년 6월, 벨 연구소는 트랜지스터를 세상에 공개했다.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언론은 의미를 잘 몰랐지만, 과학기술자들은 그것을 “20세기 가장 중요한 발명”이라고 칭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명자로 발표된 사람은 브래튼과 바딘 뿐이었다. 쇼클리의 접합 트랜지스터는 현실화되기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쇼클리는 발표를 늦추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엄청나게 분노했고, 분노를 발판삼아 미친듯이 연구했다. 그리고, 1951년, 마침내 정상 작동하는 접합 트랜지스터를 발표했다. 쇼클리의 광기에 사람들은 질려했다. 바딘은 1951년 벨 연구소를 떠나 일리노이 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브래튼은 남아 있었지만, 쇼클리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 팀이었다. 1956년 이 세 사람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지만, 쇼클리와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파탄난 상황이었다. 시상식에서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사진을 위한 쇼였고, 축하 만찬 장에서도 그들은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1831년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발견부터 1947년까지 약 120년이 흘렀다. 역사적으로 보면 불과 120년의 발견이었지만,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작은 발견들이 축적되었고, 땀과 눈물로 얼룩진 실험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고, 성공보다 실패가 수십 배 많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배웠다.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전기장, 자기장, 전자, 양자 상태.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이었다.

자연은 우리의 직관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양자역학의 이상함, 반도체의 어정쩡한 행동. 인간의 직관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실험으로 증명된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협력이 천재성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어떤 한 사람도 혼자서 트랜지스터를 발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세대를 거친 지식의 축적이었고, 다른 분야 과학자들의 협력과 경쟁의 산물이었다.


트랜지스터가 발표되었을 때, 과학계는 흥분했지만, 일반 시민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작고, 이상하게 생겼으며, 진공관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 뉴욕타임스조차 트랜지스터 발표 기사를 신문 마지막 페이지, 라디오 프로그램 안내 옆에 작은 단신으로 실었다. “벨 연구소, 새로운 전자 소자 발표.” 이것이 세상을 바꿔 줄, 이것이 컴퓨터를 손바닥 크기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도 이것이 새로운 산업을, 새로운 경제를, 새로운 제국을 만들어낼 줄 몰랐다. 그리고, 아무도 이것을 발명한 천재 과학자가 곧 그의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그들이 실리콘 밸리를 만들어낼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칩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실리콘 밸리의 탄생

1955년, 쇼클리는 벨 연구소를 떠나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벨 연구소에서 충분한 성과를 냈고, 엄청난 명성을 얻었지만, 아직 충분히 돈을 벌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그를 서부로 이끌었다.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의 병든 모친이 근처에 살아, 자주 병문안 갈 수 있었다. 그는 팔로알토 근처의 작은 도시, 마운틴뷰에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이곳은 포도밭과 과수원이 그림처럼 펼쳐진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좋고 스텐포드 대학교가 가까이 있으면서, 뉴욕과 보스톤의 고리타분한 관리자들이 없는 이곳이 기회의 땅이 될 것으로 믿었다. 이듬해에 쇼클리 팀이 노벨상을 받으면서, 그의 연구소는 전국의 젊은 과학자들이 선망하는 곳이 되었다. 수많은 입사 지원서가 쇄도해서, 분류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였다. MIT, 캘리포니아 공대, UC Berkley 등의 명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유능한 인재들이 쇼클리와 함께 하고 싶어했다. 벨 연구소의 팀처럼, 쇼클리는 신중하게 팀을 구성했다. 단순히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쇼클리의 반도체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들을 원했다. 화학자, 물리학자, 전기공학자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팀을 구성해야 효과가 좋다는 점도 고려해야했다.


그 결과, 당대 최고의 청년 학자들이 팔로알토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후에 <무어의 법칙>으로 유명해진 고든 무어(Gordon E. Moore), 직접 회로를 개발해 마이크로 칩의 시대를 연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 마이크로 칩 생산 공정을 개발한 진 호어니(Jean A. Hoerni) 등이 참여한 말 그대로 드림 팀이 구성된 셈이었다. 모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쌩쌩한 젊은 학자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반도체 트랜지스터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은 희망에 차 있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연구를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모두 고양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곧 깨닫게 되었다. 천재와 함께 일하는 것과 천재를 위해 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쇼클리의 경영 방식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동료들을 평가할 것을 요구했다. 누가 가장 똑똑한지, 누가 가장 창의적인지, 심지어 누가 가장 쓸모없는지 순위를 매기라고 했다. 문제는 이 결과를 공개했다는 사실이다. 노이스는 이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것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동료들이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협력 대신 경쟁이, 신뢰 대신 의심이 자리 잡았다.”


더 심각한 것은 쇼클리의 기술적 고집이었다. 그는 4층 다이오드라는 복잡한 소재 개발에 집착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쇼클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전자회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하고 고장나지 않는 트랜지스터였다. 시장의 요구를 무시하고, 첨단 기술만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기술 중심적 사고방식’이었다.


“자네들은 이해하지 못해. 이것은 혁명적인 기술이야. 시장은 우리를 따라올 것이네.”


무어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쇼클리는 훌륭한 과학자였지만, 끔찍한 경영자였다. 그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자기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많은 경우 그랬지만, 그것만으로는 회사를 경영할 수 없었다.”


1956년 어느 날, 쇼클리는 전 직원에게 통보했다. “여러분들은 모두 심리 테스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팀의 효율성을 최적화하기 위한 과학적 방법입니다.” 그의 통보는 많은 사람들을 당황시켰고, 그만큼 실망을 안겼다. 촉망받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에게 심리 테스트라니. 게다가 수백 개에 달하는 질문들도 모두 괴상망측했다. 당신은 불안을 자주 느끼는가?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을 사랑했는가? 도대체 이런 질문들이 반도체 개발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더 심각한 것은 테스트 이후에 벌어졌다. 쇼클리가 이 심리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누군가 높은 신경증 점수를 받으면, 그 사람은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일은 노이스에게 특히 심각하게 다가왔다. 쇼클리가 한 직원의 심리 테스트 결과를 다른 직원들 앞에서 공개하고 분석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 사람은 권위에 대한 저항이 강합니다. 이것은 조직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쇼클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때, 노이스는 자신의 길을 정했다. 도저히 쇼클리와는 같이 할 수 없다는 점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1957년에 일어난 일은 노이스를 비롯한 젊은 과학자들의 결단을 재촉했다. 그해 초 실험실에서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 한 연구원이 실험 중 손가락을 다쳤지만, 실험실에서는 비교적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쇼클리는 광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고가 아니고, 누군가에 의한 고의적 조작이라는 의심을 얘기하며, 명탐정 셜록 홈즈로 빙의했다. 그는 각 직원들을 불러 심문했고, 용의자를 찾는 다며 이상한 짓들을 하고 다녔다. 결과적으로 용의자를 찾지 못했다. 그냥 단순한 장비 결함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노이스에 이어 무어의 마음을 흔들었다. 더 이상 쇼클리를 신뢰할 수 없었다.


어느 저녁, 몇몇 젊은 과학자들이 술집에 모였다.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 진 호어니, 줄리어스 블랭크, 빅터 그리니치, 유진 클라이너, 제이 라스트, 그리고 셸던 로버츠. 8명의 젊은 과학자들은 회사와 쇼클리에 대해 분개했지만,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는 노벨상을 받은 최고의 과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술 기운이 돌아서 그랬는지, 그들은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견이 모아졌다.


1957년 10월, 이 여덟 명은 쇼클리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쇼클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본인의 생각에는 자신이 그들에게 큰 은혜를 배풀었는데, 돌아온 결과는 회사를 떠나겠다는 통보이니,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쇼클리는 그들을 “배신자 8인(Traitorous Eight)”이라고 부르며, 업계에 이들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들을 채용하는 회사는 자신의 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상황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8인의 과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선택이 좁아졌다. 사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투자자를 알고 있었고, 이것이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은 것이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방위산업에서 큰 돈을 번 페어차일드 카메라의 회장 셔먼 페어차일드(Sherman Fairchild, 1896~1971)가 이들의 투자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페어차일드와 8명의 과학자는 망설이지 않았다. 총 150만불의 투자금을 바탕으로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를 창립했다. 산업적으로는 기술 스타트업과 벤처 캐피탈의 결합 모델이 본격화된 계기이기도 했다.


핵심 인력이 빠져 나가자, 쇼클리 연구소는 빠르게 몰락했다. 남은 직원들의 사기도 떨어져서 능률이 줄어들었고, 이미 소문이 퍼져 유능한 과학자들이 지원하지 않았다. 1960년, 회사는 사실상 폐업했고, 쇼클리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학계로 돌아갔다. 반면, 배신자들은 승승장구했다. 무어와 노이스는 몇 년 전부터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자 동료들과 함께 이 이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실현해 나아갔다. 실험실에서 밤을 세고 숙식을 하면서도 피곤할 줄 몰랐다. 그들은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개발했고, 부품을 별도로 만들어 전자회로에 삽입하는 방식이 아닌, 실리콘 기판위에 모든 부품을 구성하는 ‘직접회로(Integrated Circuit, IC)’로 나아갔다. 무어와 노이스는 쇼클리가 사라진 공간에서 새로운 스타가 되어갔다. 전자 산업과 칩의 이야기는 쇼클리가 아닌 배신자 8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작가 소개

작가는 삼성전자 연구소에서 반도체 설계를 담당한 후 다수의 다국적 화학 기업에서 신사업 설계와 글로벌 확장 전략을 담당했다. 녹색 기술혁신의 글로벌 사업화를 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속 가능 사업 전략과 순환 경제 확산에 관한 해법을 모색하고 컨설팅하고 있다. 또한,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면서 시민사회 단체와 함께 공동체의 기술 시민성과 회복 탄력성 향상 방법을 연구중이다. 주요 저서로 <기후위기+행동사전>, <브레이킹 바운더리스>, <혁신기술 마케팅 전략>, <화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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