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 여행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이다. 한국보다 8시간이 느린 유럽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면 마치 미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가족끼리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나도 어디든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이라 여의치 않았다. 휴대폰의 연락처를 둘러보다가 집 전화번호에 눈이 갔다. 아무도 받지 않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한참이나 통화 연결음을 들었다. 그러고는 빈 전화기에 말을 했다.
“응, 나 잘 지내고 있어.”
#2
나는 광장의 가로등을 좋아한다. 불이 켜지지 않는 낮에는 아무도 가로등에 신경 쓰지 않는다. 나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 늘 그 자리에 서서 어둠이 찾아오길 기다린다. 어둠이 오면 비로소 가로등은 모든 이에게 골고루 빛을 나누어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존재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난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
볕이 좋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광장마다 가로등이 켜진다. 가로등이 고장 나, 빛이 사라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 빛의 소중함을 알겠지. 어둠에 갇혀 빛을 아쉬워하겠지. 사라진 후에야 떠난 사랑의 빈자리를 깨닫듯이. 사랑의 소중함을 늘 너무 늦게 알게 되는 우리의 삶처럼.
가까이 있는 것들의 가치를 잊고 살아가는 이 고질병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근거리 가상실증?
#3
디낭의 뫼즈강변 길을 걷다가 다리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의 모습에 잠시 눈길이 멈췄다. 그리운 이들이 많아서 그런가보다. 다리 위 연인의 모습이 잘 보이는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그리운 인연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스케치를 했다.
강바람이 약간 쌀쌀했지만 커피는 노천에서 마셔야 제 맛이지, 혼잣말을 하며 웃었다. 내 웃음을 봤는지 맞은편 테이블에 홀로 앉아 와인을 마시던 노신사가 멋진 눈웃음을 지으며 슬쩍 잔을 들어올렸다. 먼 훗날의 내 모습도 저토록 여유 있고, 너그러워보였으면. 나도 웃으며 커피잔으로 건배를 했다.
#4
세찬 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성당 뒤편의 요새 난간 앞에 쪼그려 앉아 난간 사이로 뫼즈강변과 건너편 시가지를 바라봤다. 저 건너편 어딘가에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보며 감격하고 있을지 모를 다른 여행자를 떠올렸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같은 감정의 결을 지닌 이가 또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