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한가족 8명
"띵동, 뉴질랜드 민박집이 문을 열었습니다."
한국에서 언니와 아들 3형제가 왔다. 그래서 아이 5명, 어른 3명이 됐다.
결혼 후 친정 식구들을 만나면 아들 4, 딸 1로 ‘독수리 5형제’가 합체된다.
한국나이로 14살, 12살, 11살, 9살, 8살의 아이들. 키도, 몸무게도, 성격도, 기질도 다 다르다. 그런 그들이 이번 겨울(이곳은 여름) 우리 집에 모였다.
항공좌석이 예약되는 순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물론 언니도 있고, 남편도 있지만 이 집의 안주인으로서 8명의 살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손이 크지 않다.
작고, 예쁘고,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음식을 차린다. 그래서 가끔 손님이 오거나 양이 많아지면 감을 못 잡고, 간도 못 맞추는 초보요리사가 된다. 머리를 한참 굴려 8인분에 맞춰 요리를 했는데,
앗, 10대 청소년들이 두 그릇씩 먹는다는 사실을 놓쳤다!
식사와 식사시간 사이에 또 한 끼의 식사 같은 '간식'을 먹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때부터 질보다 양으로 승부를 걸었다. 집 앞 마트가 아니라 코스트코에 달려갔고, 우유, 계란, 빵, 치약, 휴지 등의 기본 제품은 3개씩 카트에 담았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오는 유명한 레스토랑 키친에 취업한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때로는 아침, 저녁으로) 밥솥에 10인분을 올렸고, 서랍장 한편에서 자고 있던 제일 커다란 들통을 꺼내 어묵탕 가득, 미역국 가득, 삼계탕을 가득 끓였다. 야채 다지는 일은 무조건 기구를 이용해야 했고, 하루에 식기세척기를 두 번씩 돌려야 했다.
“여기, 민박집이야? “ 응답하라 1998에 나왔던 장면들처럼 많은 양의 고기반찬들이 가득가득 올려진 그릇들을 보며 남편이 물었다. 그 말에 대답할 시간도 없었다. 밥을 무한리필해 가며 그 많은 음식들을 배에 가득가득 채워가는 아이들 챙기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걸 '돌밥'이라고 한다고 했다. 돌아서면 밥 할 시간, 돌아서면 또 밥 할 시간. 돌밥뿐이 아니었다.
홀리데이 프로그램에 보낼 때면 아침마다 런치박스를 5개씩 쌌고, 바다나 수영장에 다녀오면 세탁기와 건조기는 야근을 해야 했다. 다 같이 이동하는 것도 평소보다 쉽지 않았다.
그런데,
5명의 아이들의 눈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잠들 때까지 모여 까르르 웃어댔고, 표정도 밝았고, 단체로 하니 새로운 일도 불평 없이 도전했다.
워프에서 키를 넘는 바다로 점프, 공원에서 염소와 양 먹이 주기, 농장에서 딸기와 블루베리 따기, 테니스, 베이킹... 어디를 데리고 가도 즐거워했다. 단 한 명도 핸드폰이나 패드를 찾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뽀얗던 아이들의 피부는 어느샌가 까무잡잡해졌다.
5년 전 꼬마들이 우리 집에 모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못 본 사이 참 많이 커있었고, 그만큼 우리는 부모라는 모습으로 살아왔음을 느꼈다.
다음에 만나면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이 이번처럼 뛰어놀기나 할까 싶기도 하고,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기는 할까 싶은 생각도 들어 힘은 들었지만 소중한 보물 같은 시간이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조카들이 말했다.
"영어를 잘 못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오길 잘한 것 같아요."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고, 사진 속의 뉴질랜드만 기억하던 아이들이 직접 영어로 주문을 하고, 파란 하늘을 보고, 맨발로 뛰어놀면서 마음이 한층 성숙해져 있었다. 본인들이 직접 느낀 것으로 내 '돌밥'에 대한 비용은 처리됐다. 이보다 더 좋은 비용처리가 있을까,
무엇보다 결혼 후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언니와 좋은 시간을 보냈다. 평생을 투닥거리며 붙어살았는데, 결혼 후 다시 이렇게 오래 붙어있었던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덕분에 어릴 적 내 모습이 생각이 났고, 그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아 낯설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멀리 떨어져 살아서 아쉽지만 붙어지내면 어릴 적 그때처럼 또 싸울 테니, 다시 독수리 5형제가 합체되는 그날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기로 약속하고 우리는 또다시 긴 이별을 맞이했다.
"띵동, 뉴질랜드 민박집이 문을 닫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