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케이 Jan 17. 2024

'국물도 없어'의 쓰임

대화의 단서

“국물도 없어” 국어 대백과사전에 실려있을 것 같은 이 말의 찰짐을 나는 맛봤다. 사랑과 연애만큼 재밌는 게 없는 요즘 그것만큼 분노와 실망을 자주 선사하는 것도 없다. 다채로운 감정의 스위치를 온오프 하며 어제 한창 실랑이를 하는 와중이었다. 현상만을 두고 보면,  내 자존심이 그이 앞에서 못나게 구겨지는 상황이었고 나는 상황 이면에 깔린 상대의 못된 시선을 짚고 나섰다. 좋을 때 함께 하하 호호하듯이 못난이 옆에 못난이를 세웠다.


제는 데이트비용이 문제였다. 불만제기를 한쪽도 적극적으로 문제를 성토하는 입장도 나였다. 반대로 어제 별문제 삼지 않던 쪽이 있었다. 그러나 꼭 어제가 아녔던 거지, 불편함이 없다는 건 아니였다. 이왕지사 어려운 화두를 끄집어냈으니 다 얘기하고 싶었다. 언제나 정도가 문제이지만 어제는 싸우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실로 얼마나 차이 나는지도 모르지만 취향이 위스키, 오마카세, 여행이고, 함께 하고싶단 걸 알겠다. 그에 못지않게 내 취향도 클래식, 전시회 등 고상하다. 즐기는 데 비용이 꽤 든다. 그런데 거기에 현실적인 문제도 더해 주담대와 올해부터는 대학원도 간다. 그러니 자주 종종 근사한 맛집 가자는 걸 안된다고, 성수기 비행기는 티켓팅을 핑계로 번번이 무산되길 바라며 괜한 짜증이 쌓여갔다.


그러나 서로 알고는 있었던 거다. 누가 더 많이 내고 있는지를. 누가 더 많이 내는 건 숫자로 보이는 결괏값이다. 그런데 누가 더 신경 쓰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표가 없다하면 더 큰 비행기를 타자고 하기 전에 연말 분위기도 나고, 경비는 타협가능한 선으로 대안을 제시해야 했다. 그럴 때면 데이트 계획을 짜는 게 아니라 국내시찰 보고서를 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내 노력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니 얼마나 무너져내리는 자존심인가. 그때 너도 상처받으라고한 말이 “십 년 뒤에 내가 너보다 더 벌 때면 어쩌려고 그래?”였다. 나는 아직도 이 말의 창피함을 다 알지 못한다. 뱉은 말이라 되돌리기도 없다. 그저 “까닥하면 국물도 없어”라는 말에 그의 각성과 실소가 동시에 터지는 걸 봤다.


어제 나의 국물도 타령은 그에게 지금의 상황을 이유로 이직을, n잡을 할 수 없지 않냐는 답답함을 십 년 후의 미래 자산을 당겨와 협박했다. '이런 걸로 자존심이 상할 줄은...'부터 대안과 가짜거절로 눈치껏 알아서 잘하자로 빈정은 상하되 마음이 상하지 않을 말장난 정도로 어려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다시 시작된 하루 중에 잠깐 가만히 있는 시간이었다. 어깨 위로 공기가 앉는 것 같은데 그게 아프게 느껴졌다. 못된 말을 해서겠다. 사실 연인 사이에 흔히 있는 상황이라, 앞으로의 해결방법도 간단하기만 했다. 눈치껏 잘하자.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음이 너무 무겁다. 내가 아는 상대도 그럴 거다. 뱉은 말 중에 걸리는 말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켰다. 분명 이유 있는 싸움이었지만 나는 이 싸움의 끝에, 졌다고 말한다. 어찌 된 일인지 미안함만 남아서다. 그리고 난 이 싸움 끝에 졌다고 말하는 사람을 또 보았다. 서로 졌다고만 하는 싸움. 혹시 이런 게 칼로 물 베는 싸움인 걸까. 국물도 없다는 말의 쓰임과 좋아하는 사람이 진다고 할 때 모두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게 칼로 물베기라고 한다면 어제는 아주 많이 배웠다

작가의 이전글 불빛 아래 추억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