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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Jul 25. 2022

2000 : 밀레니엄 블루스 #2

92학번 남자의 우격다짐 밀레니엄 취업기(ft.술자리 면접)

 이틀 뒤 오후 다섯 시쯤, 난 과감 핑크빛이 감도는 화사하게 촌스러운 양복을 골라 입고 5호선 여의나루 역에 내렸어. 나의 여의도 입성을 환영이라도 듯 옅은 핑크색으로 빛나던 문화방송 건물을 지나 KBS 별관까지 십 분 정도 걸어갔더니 K** 증권 건물이 보이더군.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한 다음, 미리 알려준 대로 4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인사과로 가서 OOO 대리를 찾았어.

 오늘 면접을 보는 인원은 나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여자와 나 둘 뿐이었지. 마른 체형의 그 여자는 검은색 치마 정장을 입고 귀를 살짝 덮는 갈색의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꽤 강단이 있어 보였어. 만만치 않겠군. 그래도 50%의 확률이면 너무 감사한 상황어서 어떻게든 난 오늘 이 싸움에서 승전보를 울리고 싶었어.

 여자, 그리고 어리다. 난 이 두 단어를 조합해 면접장으로 향하는 짧은 순간 승산 있는 면접 전략을 짜 보려 두뇌를 풀 가동해 봤어. 일대일 면접이 아니라 동시 면접이라는데 어떻게 해야 내가 더 돋보일까, 어떻게......

 머리를 계속 굴려 봤지만, 전혀 답이 나오지 않더군. 일단, 면접을 하면서 쥐어짜 보자란 생각으로 면접장으로 비장하게 들어섰어.


 면접장엔 따로 이름이나 직함을 써서 올려놓은 종이 팻말도 없는 테이블 뒤로 하나같이 칙칙하고 어두운 색깔의 양복을 입은 세 명의 중년 아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어. 나와 단발머리 여자는 인사과 대리가 이끄는 대로 접이식 의자에 앉아서 면접이 시작되기를 기다렸어. 면접관 셋 중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소 황당한 제안으로 면접을 시작하더군.

 ‘안녕하세요. 인사과 부장 OOO입니다. 청진 씨 그리고 OOO 씨, 두 분 다 술은 드실 줄 아세요? 경직된 면접 말고, 좀 편하게 이른 저녁 겸 술 한잔 같이 하면서 어떤 분들인지 파악해 보고 싶어서 ‘술자리 면접’을 오늘 좀 해 볼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허걱! 주량이 최대 소주 한병인 난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어. 그리고 뭐 어차피 우리한테 선택권도 없는 거 같은데 질문은 왜 또 하는 거야? 어쨌든 난 망설이는 기색 없이, ‘전 좋습니다!’라고 말했어. 단발머리도 곧바로 ‘저도 괜찮아요.’라고 대답하더군. 우리 대답을 듣고 면접관끼리 잠시 말을 주고받더니 이번엔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남자가 말했어.

 ‘전 영업추진부 부장 OOO입니다. 면접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저녁에 술 한잔 하시면서 편하게 얘기 나눈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네요. 그럼, 이동하실까요.’



 

 

그즈음 TV 뉴스나 신문 기사에서 가끔 소개되던 술자리 면접이란 걸 내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어떻게든 저 단발머리보다는 튀어야지, 라는 생각만 난 계속하면서 진짜 면접장인 본사 건물 옆 ‘OO관’이란 식당으로 우린 향했어.     

 이후 두 시간 정도 진행된 술자리 면접은 내가 얼마나 간절한지, 그래서 얼마나 교활해지고 비굴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 자리였어. 인사부장은 간단히 밥만 먹고 갔고, 합격하면 같이 일하게 될 영업추진부 부장, 과장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대리 한 명까지 해서 나를 포함 총 다섯 명이 술자리에 남게 됐어. 눈치 게임이라도 하듯 너무 나대지도, 그렇다고 너무 소극적이지도 않은 황금률을 찾아 긴장한 채 술을 마셨지. 단발머리 여자도 빼지 않고 주당인 듯한 부장의 술잔 비우는 속도에 맞춰 뚜벅뚜벅 함께 직진 중이었어.

 ‘OO 씨, 여자치고는 술 세네. 하하하.’

 부장이 한 템포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오는 술자리의 홍일점, 단발머리의 연속적인 원샷 퍼포먼스에 찬사랍시고 해댄, 성인지 감수성 꽝인 발언에도 그녀는 AI 같은 미소만 날려주고 있었어.

 아, 난 망한 건가. 최선을 다해 경주한다 해도 소주 한 병 반이 치사량인 내 주량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에 불안감이 점점 쌓여갔지. 다섯 명 중 술을 제일 못 마시면서도 술 마신 티를 가장 확실히 내는 사람은 나인 거 같았거든. 네댓 잔쯤 마신 거 같은데 이미 난 온몸으로 불타오르는 중이었. 술이 치사량에 이르기 전에 그리고 대세가 단발머리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기 전에 뭔가 승부수를 던져야 한단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똥줄이 타기 시작했어.


 단발머리는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자세로 토론토 어학연수와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을 들려주면서 차곡차곡 점수를 따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부장의 표정과 사람들 눈치를 보니 아직 굳히기에 들어간 것 같진 않았어. 이때쯤 내가 치고 들어가 한방, 바로 한방을 터뜨려야 하는데...... 난 계속 머리를 굴리며 치고 들어갈 틈을 엿봤지.

 듣보잡 이스라엘 키부츠(Kibutz)에서의 자원봉사 경험도, 900점을 겨우 넘긴 토익 점수도 단발머리의 만점에 가까운 토익 점수를 갖춘 넘사벽 스펙엔 비빌 바가 아니니 정공법은 위험하다...... 그래, 그렇다면 난 군대다! 남자 사람들에겐 군대 얘기만큼 애증이 뒤섞인 맛깔난 안주거리도 없으니, ‘밀리터리 코인’을 타고 승부를 볼 수밖에!


 ‘강릉 무장공비 때문에 병장 말년 완전 꼬였지 뭡니까!’

 이야기가 소강상태에 빠진 듯한 시점에서, 난 좌중의 시선을 끌어모으며 멘트를 날렸지. 성공적. 그리고 남은 건 MSG의 시간. 내가 속했던 사단의 다른 부대가 무장공비 소탕 작전 막판에 공비와 교전을 해서 사살한 얘기를 마치 우리 대대에서 있었던 일처럼 구라를 쳐서 줄줄 이어나갔어. 영업추진부 삼인방의 귀는 계속 쫑긋 상태를 유지했지. 이쯤에서 누구라도 미끼를 확실히 물어야 하는데......

 ‘아, 정말? 우리 조카도 그 사단이었는데 개고생했다고 하더라고. 그 공비 잡은 부대가 청진 씨 부대였다니 대단한데, 하하하. 야, 휴가도 반납하고 멸사봉공을 실천했네! 하하하’

 부장이 덥석 미끼를 물어줘서 천만다행이라고 난 생각했어. 늦게 합류한 대리는 날 쳐다볼 때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게 중간중간 확실히 느껴졌거든. 부장이라면 대리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따위는 간단히 묵살할 수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부장이 술잔을 권하며 확실한 포인트를 내 입에 떠먹여 주더군.

 ‘청진 씨, 입담이 장난 아니네. 슬슬 본색이 나오는 건가? 재밌는 친구야.’

 정확히 말하면 본색을 더 꼭꼭 숨기는 중이지만, 이런 본색이 부장님 맘에 드신다면 그렇게 생각하시죠. 난 속으로 이보다 더한 어릿광대짓도 이곳에 취직만 시켜준다면 다 하겠다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중이었어.     



 치사량 직전까지 간 그날의 술자리 면접은 나의 우격다짐과 부장의 호응으로 2차까지 이어졌어. 공식적으로는 잡혀 있지도 않던 2차였는데 말이야. 2시간 가까이 이어진 1차 술자리만으로 대세를 만들기엔 충분하고 확실한 포인트를 쌓았다는 확신이 난 들지 않았거든. 사람이 절박한 순간에 처하면 주량도 느나 봐. 평소 같으면 인사불성이 돼서 분명 도망치듯 집으로 갔을 내가 애교를 부리며 부장의 팔짱을 낀 채 2차로 정한 근처  호프집으로 향하고 있더라고. 단발머리는 그런 내 모습에 환멸을 느낀 건지 대세가 기울었다고 느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큰길 쪽으로 사라져 갔어.

 우린 건물 이 층에 자리한 OO가르텐이란 호프집에 들어가 비공식 이차 굳히기 면접 시작했어. 그런데, 술집에 들어선 지 삼십 분도 채 안 돼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어. 난 오늘 승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패배하지도 않았구나, 라는 기이한 안도감이 밀려오면서 거대한 파도처럼 잠도 함께 같이 밀려오더라고. 그래도 이대로 잠들면 안 된다고, 대리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지우기 위해 마지막 광대짓을 해야 한다고 날 속으로 다그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 결국 생맥주 500 잔을 앞에 두고 난 반 기절 상태로 테이블 위로 곯아떨어지고 말았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대리가 큰 소리로 날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어.

 ‘청진아, 얼른 집에 가자! 정신 차려’


 아, 그들에게 드디어 난 '청진 씨'가 아니라 '청진'이 되었구나. 내 투혼은 해피엔딩이 되는 건가. 분명 비몽사몽 곯아떨어지면서 폭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깨우는 소리에 다시 난 희망의 빛을 보며 침을 닦고 몸을 일으켜 세웠어.

 11월의 찬 공기를 느끼며 우린 거리로 나왔고 대리는 득달같이 부장의 집 방향을 외치며 택시 한 대를 잡았어. 난 택시 안으로 들어서는 부장에게 구십도 폴더 인사를 하며 말했.

  ‘부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장은 사람 좋게 껄껄 웃으며 다음에 또 중간에 잠들면 버리고 간다,라는 그린라이트를 켜놓은 채 택시 문을 닫았어. 사라져 가는 택시를 바라보며 살짝 나, 울컥했던 것도 같아. 그리고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위로했. 잘했다고, 그리고 오늘 정말 고생했다고.



      

 K** 증권 인사과 직원에게서 합격했다고 다음날 연락이 왔어. 준비할 서류와 출근 날짜를 확인하고 무심한 듯 전화를 끊었지만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들어서 한동안 멍하니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어. 오매불망 바라 마지않던 금융사에 취직한 건데 환희의 찬가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왜 난 그때 멍하니 그렇게 있었던 걸까. 잘은 모르겠어. 그냥 면접날 무리에서 이탈해 걸어가던 단발머리 여자의 얼굴도 떠오르고, 술자리 면접에서 발악하듯 억지 친화력을 발휘하던 기이한 버전의 내 모습도 부끄럽게 떠오르며 맘이 복잡했던 것 같아. 그리고 그냥 올해가, 소란스럽고 힘겨웠던 뉴 밀레니엄의 첫해가 얼른 끝났으면 하는 생각만 들더라고.


 이십 년이 더 지난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나의 2000년은 부족한 대로 또 괜찮은 기억인 듯도 해. 나의 가치와 효용성을 인정받기 위해 때론 지질하고 영악했던 내가 좀 창피하기도 하지만 그 기억이 결국 또 스승이 되어 날 오랫동안 가르쳐왔으니까.

 아, 오늘은 결국 끝까지 못 봤던 장만옥 누님의 '화양연화'나 넷플릭스에서 봐야겠네.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이미 지나간 건지, 아직 오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영화라도 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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