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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Nov 13. 2022

까미노의 이름들, 마음들#2

두려움과 맞서기

수비리-팜플로나 65KM, 려움은 늘 무거웠다


  보험사들이 한 때 경쟁적으로 노인빈곤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을 마케팅에 이용다. 통계와 데이터라는 늘씬한 미신에 근거한 (수십)억소리 나는 최소한의 노후자금 액수를 TV 화면에 대문짝만 하게 박아놓고, 이만큼의 돈이 없으면 우리 모두 늙어도 곱게 늙지 못하고 추레해질 거라 협박했다. 그러니 당신은 **연금에 가입해야 하고 **보험을 들라는 식으로 귀결되는 광고를 보고 있자면 대한민국의 평범한 우리들은 이미 루저였다. 이제라도 그걸 알게 됐으니 위너가 되기 위해 대오각성하고 자본주의가 가르쳐 주는 은혜스러운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것 같았다.


 이렇듯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은 늘 불안을 낳고 그 불안은 다시 이성 눈멀게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무겁고 질척이는 추한 욕망인 줄 잘 알면서도 삶의 국면마다 나만 같은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다.


 누나와 난, 다만 또 다짐하고 다짐했다. 자고로 순례길 위를 함께할 배낭은 가벼워야 한다고. 우리가 짊어질 배낭이 예수 가시면류관을 쓰고 겟세마네 동산 위로 힘겹게 지고 오르던 피의 십자가가 되어서는 안 될지니, 욕심을 버리고(혹은 숨기고) 바라옵건대 우리들 각자의 배낭의 무게가 6KG 아래로 떨어지게 하소서, 아멘!

 그래서 짐을 꾸릴 때 주방용 저울로 그램 단위까지 물건들의 무게를 확인한 후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가를 기준 삼아 그 물건의 동행 여부를 결정했다. 그럼에도 배낭 무게는 쉽게 6이란 숫자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뾰족뾰족 그 위로 솟아올랐다. 그러다 우린, 서로에게 이 정도까진 괜찮겠지? 이건 죽어도(?) 살기 위해 필요한 거겠지?를 몇 번 반복하며 누나의 숫자는 7에 가까워지고 난 8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삼일을 걸어 팜플로나에 도착하고 나서야 누나와 난 깨달았다, 우리가 짊어지고 온 것의 대부분은 두려움의 무게였단 걸. 우린 결단을 해야 했다. 혹시 모르니,라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에 꿰여 꾸역꾸역 그리고 힘겹게 어깨와 허리를 혹사해가며 여분의 무게를 짊어지고 갈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을 곱게 집으로 보내 줄 것인가. 우린 팜플로나에 이틀씩이나 머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미끈한 풍경과 인터뷰 촬영을 위해 들고 온 짐벌, 소염 진통제 절반, 여벌의 긴팔 긴바지 등의 옷가지, 보조 배터리, 헤드렌턴 등등.... 을 모아 이국의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무게는 무려 3.3 킬로그램! 그렇다면 우리들의 배낭 무게는 원했던 대로 6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일부러 지워주지 않았는데 참 멀리도 굳이 짊어지고 와 50유로를 써가며 마침내 두려움의 덩어리 하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두려움의 숫자 3.3.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한 대가 3.3은 그렇게 미련한 우리에게서 덜어졌다.



팜플로나-푸엔테  레이나-에스떼야 110KM,  언니를 만나다


 덜란드에서 온 일흔에 가까운 두 자매와의 인연은 팜플로나 다음 마을인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로 향하는 '용서의 언덕' 위에서 시작됐다. 팜플로나를 출발해 완만한 경사를 한참 오른 후에 도착한 바람 부는 용서의 언덕은 순례길 초반을 상징하는 시그니처 스폿과도 같은 곳이다. 그곳에 짧고 마른 숨을 내쉬며 도착하, 7년 전처럼 변함없이 강아지까지 대동한 오래전 순례 행렬 무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물론 그건 실물은 아니고 실물 크기의 순례자 행렬을 형상화한 철제 구조물이다. 사람들은 가방을 내려놓고 순례자 형상 앞에서 나란히 사진 찍기에 바다. 누난 돌아가신 엄마, 아빠 그리고 나머지 칠 남매를 상징하는 작은 조가비를 짐에서 꺼내 순례자상 앞에 내려놓고 짧은 기도를 드린 후 이 순간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용서의 언덕 위 순례자상

  때 이른 감정의 격랑에 휩쓸릴까 두려워 주변을 어슬렁솟대처럼 높이 솟아오른 나무 푯말 앞에 섰다. 거기엔 용서의 언덕으로부터 세계 주요 도시까지의 직선거리가 옆으로 길쭉하게 덧댄 나무판 위에 KM 단위로 어빡자빡 표시돼 있었다. New York, Berlin... 아, 그리고 'SEUL'.  'SEUL'을 발견하고 난 뚫어지게 푯말을 쳐다봤다. 서울,.... KM. 정확한 거리는 기억나 않지만 며칠 만에 난 아주 멀리, 수만 KM를 떠나와 있었다. 스레 목에 건 엄마의 금반지에 손이 가 만지작대고 있던 그때 내 옆으로 성큼 다가와 말을 건 사람이 마그리트였다.


'No Netherland city, haha. You from Korea? Look, Seul is there!'


노란 머리를 한 키 큰 유럽 할머니. 분명 할머니였지만 하이톤의 통통 튀는 말투와 팔을 힘껏 올려 휘젓는 모습에 이십 대 못지않은 생기가 전해져 왔다.


 'I'm so sorry for you.'


  밝게 미소 지은 뒤 괜히 심각한 척 과장해 유감럽단 말을 기고 낭을 챙겨 들고 자리를 떴다. 오랫동안 이어질 '언니'의 인연 미처 짐작도 못하고 통성명도 이 말이다.

언니 마그리트와 나

 푸엔테  레이나의 알베르게는 젊음로 싱그럽다 못해 시끄럽고 번잡스러웠다. 동네 수뻬~르메르까도(슈퍼마켓)에서 사 온 음식 재료들로 주방에서 왁자지껄 파스타를 요리하는 한 무리의 이태리 청년들, 뒤뜰 잔디 위에 모여 앉아 기타를 치며 시끌벅적 노래를 부르고 고함에 가까운 수다를 떨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유럽 아이들. 잊고 있었다,  젊음은 원래 이렇게 참 떠들썩한 것이란 걸.


 간단하게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돌아와, 물집이 잡힌 발가락을 처치하고 9시도 안 된 이른 시각부터 누나와 난 잘 준비를 했다. 난간도 없어서 자다 굴러 떨어지면 최소 뇌진탕인 이층 침대의 위쪽으로 거주춤 계단인지, 사다리인지 애매한 것을 밟아 올라가고 있을 때 'boy, careful!(조심해)'란 말이 옆 침대에서 들려왔다. 침대에 올라 내려다보니 아까 말을 섞었던 네덜란드에서 온 흥부자 할머니였다. 홍반장처럼 어디서 뜬금없이 나타나 말을 거는 할머니. 그리고 갈색 머리를 했지만 어디 가서 남이라고 거짓말은 못할 또 다른 할머니 한 명이 내쪽을 쳐다보며 미소와 함께 눈인사를 건넸다. 둘은 마그리트 티네케라고 자신들을 소개며 덧붙여 예상대로 자매라고 했다. 두 분은 누나와 내가 걷는 걸 계속 봤다며 둘이 부부인지 가족인지 궁금해 서로 내기를 했다고 했다. 언니인 마그리트는 자신 있게, couple?이라고 물어봤고 동생인 티네케는 그럴리가,란 표정과 함께, you are brother and sister, right? 이라며 답을 요구했다. 나는 웃으며 남편은 한국에서 열심히 우리 남매의 여행을 위해 돈을 벌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리곤 동그란 얼굴이 서로 닮지 않았냐고 되물으며 언니들 쪽으로 느닷없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마그리트는 턱을 엄지와 검지로 만든 V자 위에 걸쳐 놓고 심각하게 침대의 위아래를 명탐정 코난처럼 번갈아 훑어본 뒤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Okay, I see you both have a round face. Don't fight and get along! haha.(그래, 너희 둘 다 얼굴이 동그랗네. 싸우지 말고 잘 지내! ㅎㅎ)'

티네케와 마그리트

언니, 마그리트


 순례자들이 고단한 몸을 누인 채 곤히 잠들어 있던 밤 열한 시경 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열시면 알베르게의 문도 닫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찌 된 걸까, 이십대로 보이는 이탈리아에서 온 몇 명의 젊은이들이 이태리어 특유의 경쾌한 발성으로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며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조심성 없이 헤드렌턴과 핸드폰 불빛을 여기저기 비추며 빈 침대를 찾아 짐을 풀고 있었다. 순례자에게 밤 열한 시란 다 큰 키도 다시 쑥쑥 자랄 정도로 한 참 깊은 숙면에 빠져 허우적댈 시간대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정도 부산스러움이라면 안 깨는 것도 이상한 것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눈이 떠졌다.

 욕이 목구멍 아래까지 치밀어 온다. 

 개코인 내 코는 알코올 입자가 방 안 대기 중으로 둥둥 떠다니는 걸 감지해 버렸다. 미스터리다. 열한 시가 넘은 이 시간, 단단히 잠겨 있었을 알베르게의 문을 열고, 술까지 마신 상태로 누군가 침대를 찾고 있는 이 상황이. 그중에서도 이 난리통에도 당당한 이딸~리아 큰애기들이 가장 미스터리했다. 거칠 것이 없다. 뭐 어쩌랴, 나이 지긋한 네덜란드의 저 언니님들을 비롯, 방 안 순례자 모두 관용 모드로 몸을 두세 번 뒤척일 뿐인데, 나라고 뾰족하게 굴 수도 없는 노릇. 어쨌든 그들의 부산스러움은 이십여 분간 계속됐다.


 사달이 난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06 : 00 AM 

 아침 여섯 시. 순례자라면 모름지기, 그리고 순례길의 극초반에 해당하는 푸엔테 라 레이나의 알베르게 숙소 정도라면 여섯 시만 돼도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잠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리고 아직 자는 사람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손끝의 감각에 의존해 어둠 속에서 부스럭부스럭, 침낭을 개고  세면도구를 챙기고 무엇과도, 혹은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게 발끝 하나하나에 신경을 모아 조심조심 화장실로 향한다.

06 : 30 AM

 여섯 시 반이 되자 방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어나 침낭을 정리하고 배낭을 싸고 있었다. 누나와 나도 침낭을 개고 아직 자는 사람들이 있어 조심조심 화장실로 향했다. 헤드렌턴과 핸드폰 불빛을 이용해 마저 짐을 싸고 벌써 밖으로 나서는 사람들도 보였다.

07 : 00 AM

 순례길에서 아침 일곱 시란 암묵적으로 밤새 꺼져 있던 방안의 불을 켜는 것이 묵인되는 시간. 누군가 '딸깍' 스위치를 올려 방안 불을 켰다. 어지럽게 어둠 속을 헤매던 헤드렌턴의 불빛과 핸드폰 불빛이 한순간 형광 불빛 속으로 모두 숨어들었다. 맘이 바빠지는 시간이다. 아직 한낮의 태양은 뜨겁다. 특히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의 태양은 태양의 나라답게 작열한다. 뙤약볕 속에서 아득하게 정신을 잃는 불상사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일찍 출발하고 각자의 목적지에 땡볕을 피해 일찍 도착하는 수밖에 없다.

 불이 켜지고 이삼십 초나 지났을까, 갑자기 불이 다시 꺼졌다. 뒤 이어지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

 'Sorry, but my friend is still asleep. Last night she went to bed very late. (죄송한데, 제 친구가 아직 자고 있어서요. 어젯밤에 늦게 잠들었거든요.)'


 순례자의 옷을 입고, 순례자의 여권을 가진 우리, 참 착하기도 하지. 대부분은 알고 있었으리라. 양해를 구하고 있는 이 여자애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어젯밤 늦게 그 소란을 피우며 우리의 고요를 침범한 무리 중 하나라란 걸. 나를 포함한 방 안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부탁에 뜨악해졌지만, 그럼에도 암말 않고 각자의 짐을 다시 조악한 불빛 아래서 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채 일분도 지나지 않아 화장실을 갔다 온 초로의 한 여자 순례자가 방 안 불을 다시 켰다. 그리고 불을 껐던 여자가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스위치를 내렸다. 이건 영화 '사랑의 블랙홀' 까미노 버전인가. 이때쯤 되니 방 안 사람들은 슬슬 짜증이 차오르는 분위기. 하지만 다들 꾹 참고 얼른 짐을 싸서 방안을 빠져나가려는 맘인 듯했다. 누나와 나도, '헐' 하며 서로를 바라볼 뿐 다들 참고 있는데 중뿔나게 나설 깜냥은 되지 못해 마저 짐을 더듬거리며 싸고 있었다.

 

 그 순간, 거침없이 스위치 쪽으로 걸어가 힘껏 불을 켜 젖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헉, 언니, 마그리트다. 그리고 허리춤에 왼손을 얹고 오른 속으로는 검지를 펴 불을 끄던 문제적 이탈리아 여자 아이를 가리키며 또박또박 이 난망한 상황을 정리한다.

 'I remember you guys made lots of noise when everybody was sleeping last night. (어젯밤 너네들 다 자는데 엄청 시끄럽게 군거 기억하거든.) But we all did say nothing about it. (그래도 우리 모두 아무 말도 안 했어.) Now see. Everyone is awake only except for your friend. (지금 봐봐. 네 친구 빼고 다 일어났잖아.) You still want everybody to be patient only for your friend's good sleep? (넌 또 네 친구 푹 자라고 모두가 참고 있길 바라니?)'


 언니 마그리트가 팩폭을 가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훈계를 하기 시작하자, 자고 있던  여자 아이와 일행으로 보이는 이십 대 초반의 또 다른 남자아이(안드레아. 다음 글에 아마 다시 등장할 듯)도 마그리트 주변으로 몰려왔다. 다행히 싸우자,는 건 아니었고 재빨리 아이들은 할머니뻘인 마그리트에게 'I am sorry'를 연발하며 사과를 했다. 마그리트는 아이들의 사과에 더는 늘어지게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랬다면 꼰대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쿨하게 돌아서서 티네케 쪽으로 가 마저 짐을 쌌다. 우두커니 서서 멀어져 가는 마그리트를 지켜보던 아이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로 조심스레 몇 마디 말을 이어가다 흩어져 각자의 배낭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이다를 기다리며 고구마를 입에 물고 있던 나머지 방 안 순례자들은 입꼬리를 티 나지 않게 끌어올리며 편안한 속으로 각자의 할 일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해야 할 말을 필요한 타이밍에 적절한 수위로 또박또박 상대방에게 전달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우린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학습이나 훈련 혹은 배짱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과 용기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까미노 위에 들어선 사람들, 그 다양한 사람들이 언제나 서로 문제없이 손에 손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건 아니다. 길을 나서기 전 두고 왔으면 좋았을 미움과 슬픔은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낯선 순례자들에게 투사되기도 하고,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과도하게 통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럴 때조차 나와 길 위의 또 다른 나들을 한번 믿어보는 것, 그 선의와 배려에 베팅해 보는 것, 그리고 균형을 잡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단단한 용기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의 아침 소동뿐 아니라 언제나 사람에 대한 믿음 위에서 먼저 다가가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또 물러서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 주던 언니 마그리트. 아마도 그녀는 내가 순례길 위에서 만난 가장 투명하고 용기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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