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훼손된 금빛 노트]

by 김노리

본 소설은 인공지능 AI와 함께 작성되었습니다



지사장에게 '퍼즈'를 던지고 엄마의 문자에 '마침표'를 찍었던 그 밤, 나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내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내 삶에서 가장 빛났으나 가장 처참하게 꺾였던 그 시절의 기록을.


국어 선생님은 나를 그저 번호로 불리는 '학생'이나 심부름 잘하는 '부반장' 이상으로 보아주시는 듯했다. 어느 날 교무실로 나를 부르신 선생님이 툭 던지듯 말씀하셨다.


"서윤아, 이번 졸업앨범이랑 교지 편집, 네가 한번 맡아서 기획해 볼래?"


선생님의 그 제안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될지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아, 네. 할게요."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을 뿐이었다. 늘 하던 가정통신문 배부나 출석부 정리 같은 일보다 조금 더 재미있고 새로운 숙제가 생겼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낡은 교실 창틈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예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내 손으로 직접 만들고 결정할 수 있다는 감각. 그것은 팍팍한 일상 속에 느닷없이 내려앉은 한 줄기 따스한 빛 같았다.


작고 연약한 생동감이 팔랑거리며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바람을 일으켰다. 창밖의 시내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거렸다. 마치 앞으로 내 인생에 아주 근사한 일들만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처럼.


교지 편집부장을 맡아 업체 미팅을 하던 날, 나는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았다. 인쇄소 직원들이 꺼내 놓은 노트는 내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던 500원짜리 싸구려 노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세련된 가죽 질감, 두툼한 종이의 서늘한 촉감. 그건 어른의 것, 전문가의 것이었다.


'00학년 00반 이름'이라고 적는 란이 있고 분홍색 키티 캐릭터로 가득 채워진 노트의 표지를 접어 넘기고, 나는 종이에 졸업앨범의 구성안과 교지에 실을 기사 제목들, 친구들의 인터뷰 아이디어들을 빽빽하게 채워 내려갔다.


어른들의 세계는 처음이었지만 이상하게 주눅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준비해온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자연스럽게 내 기획을 설명했다.


“이 페이지에는 아이들의 웃는 얼굴만 모을 거고요, 여기엔 우리가 직접 쓴 시를 넣고 싶어요.”


어른들 사이에서 내 목소리는 막힘이 없었다. 캐릭터 노트 속의 아이디어들이 내 입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올 때, 나는 마치 내가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주인인 것처럼 거침없었다. 도구의 세련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노트 속에 담긴 이 선명한 생각들이 곧 결과물이 될 것이라는 확신.


그것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입혀져 있었고,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선생님은 검은색 그랜저에 나를 태워 댁으로 향하셨다. 중후한 차 안에는 묘한 긴장감과 설렘이 감돌았다. 선생님의 집은 내가 사는 변두리와는 공기부터 다른 시내 중심가에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낡은 아파트였지만, 그곳에는 우리 집의 눅눅한 방임과는 전혀 다른 **'단정한 질서'**가 흐르고 있었다.

선생님 댁 거실 벽에는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마다 붙여주는 포토 보드지가 있었다.


"서윤아, 사람은 읽는 만큼 자란단다."


그 말 뒤에 감도는 정갈함, 지적인 자극.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내가 가고 싶은 미래'를 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선생님은 복도 맞은편 집을 가리키며 저기도 선생님의 집이라고 무심하게 덧붙이셨다. 세월이 흐른 뒤, 그 낡은 복도는 도시에서 가장 고귀한 몸값을 자랑하는 고층 아파트가 되었다.


선생님은 다시 검은색 그랜저에 나를 태워 집 앞까지 데려다주셨다. 차창 밖으로 미끄러지는 가로등 불빛이 선생님의 옆얼굴에 내려앉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낯선 물결이 일렁였다. 중후한 가죽 시트의 냄새와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가 버무려진 그 안온한 공간 속에서, 나는 아주 잠깐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간지러운 울렁임이었다. 핸들을 잡은 선생님의 단정한 손등이나, 안경 너머로 살짝 휘어지는 눈매를 훔쳐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홧홧해졌다.


'아, 이런 게 누군가를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인 걸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질문이 목구멍 끝에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선생님이라는 커다란 세계가 내 작은 어깨 곁으로 성큼 다가와 있는 듯한 착각. 그 낯선 온기가 싫지 않아 나는 자꾸만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누군가에게 이 마음을 들킬까 봐 겁이 나면서도, 이 시간이 조금만 더 천천히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


열다섯 살의 내가 처음으로 품어본, 이름 붙일 수 없는 분홍빛 비밀이었다.


하지만 차가 집 앞에 멈춰 서자,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재기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와 씩씩하게 인사했다.


"선생님,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일 학교에서 봬요!"


차 문을 닫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방금 느꼈던 그 묘한 떨림을 짐짓 아무렇지 않게 가방 깊숙이 밀어 넣은 채, 나는 다시 나의 평범하고도 익숙한 현실이 기다리는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순간, 그 모든 황금빛 환상은 진흙탕에 처박혔다.


"머 하느라 이리 늦었노? 선생이랑 바람났나?"


엄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저급한 농담. 아니, 그것은 농담이 아니라 저주였다. 내 순수한 열정과 선생님의 고결한 지도를 단숨에 추잡한 스캔들로 전락시킨 칼날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나 수치스러워 숨이 막혔다.


그날 이후, 나는 선생님께 일부러 각을 세웠다. 살가움은 사라졌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인문계 고등학교 대신 이름도 모르는 특성화고에 가겠다고 생떼를 썼다. 선생님의 관심을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들킨 내 마음이 사실이 아니라고 마구 숨기고 싶은 행위였다.


선생님은 두꺼운 유리 깔린 책상 아래, 모니터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씀하셨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앞으로 그 이야기는 다시 안 한다."


냉정한 표정이었지만, 그 너머엔 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졸업 전 마지막 작업 날, 선생님은 뿔테 안경을 쓴 마른 청년을 소개해주셨다.


"내 제자다. 공부를 정말 잘했는데, 내가 시인을 만들었지."


돈이 되는 의대나 당신의 명예를 세울 법한 화려한 길 대신, 지극히 배고프고 외로운 시인의 길을 걷게 한 선생님. 그건 선생님이 그 청년에게서 본 '반짝임'을 지켜주기 위한 당신만의 지독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선생님이 내게 보냈던 신호는 단순히 성적이 좋으니 더 큰 학교로 가라는 응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네 언어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귀한 존재'**라는, 내 생애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경이로운 신뢰였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 손을 잡지 못했다. 엄마가 툭 던진 그 비루하고 저급한 농담은, 열다섯 살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둔탁한 통증과 파열을 남겼다. 선생님이 보여준 그 정갈한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엄마의 말 한마디에 내 존재 자체가 오염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창한 분노라기보다, 감히 그 빛나는 세계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다고 믿어버린 어린 마음의 뒷걸음질이었다.


[제미나이, 나 이제 알 것 같아. 그날 엄마의 그 한마디가 왜 그렇게 아팠는지. 엄마는 내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걸 축하해 주기는커녕, 그저 저급한 농담 하나로 내 세상을 오염시켜 버렸어. 그 비웃음 앞에서 나는 내가 쌓아온 모든 진지함이 부끄러워졌고, 결국 스스로 그 빛나는 세계에서 뒷걸음질 쳤던 거야. 그날의 수치심이 아직도 내 발목을 잡고 있어.]


스마트폰 화면이 조용히 깜빡였다.


“서윤 님, 열다섯의 당신이 느꼈던 그 수치심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처음으로 만난 '빛나는 세계'를 소중히 여기고 싶었을 뿐이에요. 누군가 무심코 던진 돌에 당신의 황금빛 노트가 찢겼지만, 그 안에 적힌 당신의 반짝이는 생각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 노트를 다시 펼쳐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요."





작가의 이전글[제3장. 기울어진 거실, 핑크빛 갈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