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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 Nov 09. 2024

[숨은영화찾기]운명을 그토록 사랑하여. 영화 <컨택트>

*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최근 과학계에선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 근대부터 보편적으로 여겨지던 ‘시간’이라는 개념은, 과학계의 논쟁처럼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는 일찍이 이러한 내용을 다룬 공상과학영화이다.


주인공은 불치병을 앓던 딸을 잃고 남편과 이혼한, 여성 언어학자 루이즈 뱅크스. 아픈 기억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던 시간이 길었던 뱅크스 박사는 갑자기 지구 하늘에 거대한 외계인의 우주선이 나타나 이 국제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과 NASA에 차출된다. 문제는 우주선이 착륙한 몇 날 며칠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떠 있기만 했다는 점이다.


이 외계인의 말 없는 우주선을 두고,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물리쳐야 할 목표물로 취급해 적대시하는 군인들과, 같은 현상을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물리학자 도넬리와 언어학자 뱅크스 팀은 일단은 서로 협력하에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기까지에 이른다. 마침, UFO의 문은 지구인이 우주선에 들어오기를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열리는데.


우주선에 들어간 뱅크스팀은 눈앞에 나타난 외계인의 모습이 인간과는 생김새가 크게 달라, 그것만으로도 공포와 억압을 느낀다. 하지만 우주인은 경계와 공격은커녕 공중에 먹물 같은 것으로 원 형태의 무언가를 그려 띄운다. 파트너 도넬리도 처음은 겁에 질렸으나, 뱅크스의 용기 있는 시도로 외계인이 공중에 그린 것은 인간에게 ‘말을 거는 행위’라는 것을 해석하는 것에 성공한다.


원형 고리처럼 생긴 우주인의 글씨를 촬영해 온갖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언어학자인 뱅크스를 필두로 우주인의 언어를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언어를 해석하는 도중 발생한 오해와 공포에 사로잡힌 군인들은 무력으로 우주선을 먼저 공격하기 시작한다. 또한 세계인들은 ‘우주인의 침략’이라고 생각해 파문과 항거를 계속했다. 국제 정세 측면에서도 이 우주인의 언어를 해석하는 것은 외교적 경쟁 문제로 번져, 핵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자는 세력이 힘을 얻어 전쟁의 위기까지 확산한다.


이처럼 학자들이 주장하는 우주인에 대한 온건한 대응은 많은 사람들을 답답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가진 학식으로 누구보다 외계인의 언어를 빠르게 해석한 뱅크스는 보통 인간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꿈으로, 나중에는 현실에서 홀로 동시성을 경험하는 마치 ‘신들린 영매’를 연상케 하는 착란을 경험하기도 한다.


인간의 글자는 위에서 아래, 혹은 좌에서 우로 쓰이는 데에 반해 원형으로 이뤄진 외계인의 언어는, 뱅크스의 시간 감각을 뒤틀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뱅크스는 깨닫는다. 과거에 일어난 줄 알았던 딸과 남편과의 이혼 경험은 사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었다는 것을.


이로써 영화의 구성은 과거-현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현재-미래로서 시간 감각이 뒤틀어지는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하는 셈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미래에, 사랑하는 사람과 더없이 행복한 순간을 살아가려면 더 나중 미래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을 맞이해야 한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우주인에게 시간을 초월한 믿음을 ‘선물’받은 그녀는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우리는 흔히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집착을 버리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 뱅크스는, 언젠가 딸을 잃을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딸과의 행복’을 다시 선택한다. 사랑하는 딸을 다시 만나기 위해.


김영하 작가는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의 자신을 자책하고 후회하는 데에 사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사랑만이 우리를 현재에 머물게 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어쩌면 뱅크스는 과거도 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온전히 사랑하는 그 현재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우주의 영속성 속에선, 그 어떤 고통이나 집착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믿음만이 오로지 실존한다는 사실을. 시간이라는 선형 감각이 사라져 온전히 현재를 살아갈 수 있을 때, 즉 사랑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되는 게 아닐까.


니체의 영원회귀(Amor Fati)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 중에서



움직이는 화랑 <비껴서기> 운영 |

코스미안뉴스 인문 칼럼니스트

브런치 작가

bkksg.com

bkksg.studi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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