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가 조금 늦었지만 지난달에 있었던 세시반 콘서트는 나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공연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음악회를 준비하는 태도에 대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피아노를 치는 법에 대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내 인생과 음악의 전환점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은 나의 생각을 흔들림 없이 세상에 표현하는 것(projection)이 중요하다 생각했고 그런 강인함을 남에게도 강요했었는데, 그게 먹혀들어가지 않는 벽에 부딪히고 좌절하는 시간을 거쳐 내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게 되었다(introspection). 내가 변하는 것이 남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깨닫고 나니 이제는 한국에서 음악을 해도 행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걸 알게 된 것이 기쁘고 감사하다.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잘 살고 싶어서이다. 인생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고, 재미있게 그리고 후회 없이 살고 싶다. 음악을 잘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음악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어 궁극적으로 좋은 삶을 사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내게 인문학이다.
클래식 교양수업 강의를 하면서 작년까지는 가끔 억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클래식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니에요~ 클래식이 얼마나 좋은데요~'하면서 비굴하게(?) 클래식의 매력을 어필하려고 애쓰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다. 클래식이 그들만의 리그네, 고상하네 어쩌네 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호객행위 하듯 다가가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 근래에 태도를 바꿨다. 클래식은 원래 어려운 게 맞다. 대중의 기호에 맞춰 쉽고 가벼운 음악인 척하는 건 클래식의 진짜 매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거다. 아니, 어렵다기보다
클래식은 친절하지 않다.
클래식은 감각을 즉각적으로 자극하는 대중문화와는 다르다. 먼저 다가가지도 않는다. 제대로 알기 전에는 차갑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무언가 일상에서 결핍을 느껴 찾아오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깊은 맛을 보여주는 것이 클래식이다.
음악도 책도 나는 클래식이 좋다. 베스트셀러보다 고전소설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똑똑한 체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인생이 너무 허무해지며 사람이 왜 태어나야 하는지, 덧없는 인생을 사는 의미가 뭔지 고민하던 시절에 톨스토이 책들을 읽으며 위로받고 답을 찾았었다. 그 뒤로 고전소설의 매력에 빠지게 되어 마음에 드는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가는 식으로 책을 골라 읽고 있다. 클래식은 베스트셀러처럼 술술 읽히지 않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을 통해 때로는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산다는 게 뭔지, 그렇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준다. 현실에서는 몇 없는 대화 상대 대신 시대를 초월해 누군가와 내 관심사를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는 기분이 든다. 어떨 땐 어려워서 책 한 권을 몇 달씩 붙들고 있는 적도 있지만 그렇게 정독을 마치고 나면 속이 너무너무 후련하다.
2019년에 아빠 돌아가셨을 때나 작년에 엄마 쓰러지셨을 때 나보고 굉장히 꿋꿋하다고, 맏딸 노릇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침착해지고 집중력이 있다고 느끼기는 하는데 그 원천이 음악이 아닐까 싶다. 어려워서 해낼 수 있을까 자신 없지만 도전할 수밖에 없는 연주자로서의 경험, 더듬더듬 악보 보기 시작하며 도저히 진척이 안 보일 것 같은 곡을 무던히 연습하다 보면 어느새 수월하게 칠 수 있게 되고, 음표를 넘어선 의미를 가늠하게까지 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마음 수련이 되었던 게 아닐까. 살면서 쉽고 즐거운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무섭고 싫은 일도 겪을 수밖엔 없다. 근데 어려운 일도 묵묵히 할 일 하며 지내다 보면 어느새 지나가있더라. 어려운 클래식이라 그런 훈련이 가능하지 않았으려나.
이제는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클래식은 우리에게 인생의 길잡이가 되고 마음의 힘을 길러주는 인문학이라고, 그 가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