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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경 Dec 19. 2023

한국 반주 vs. 미국 반주

한국에서 반주를 많이 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하게 되면 미국에서와의 문화 차이를 엄청 느낀다. ​


일단 반주에 관련된 용어 자체가 다르다. 한국에서는 같이 연습하는 것을 '반주 맞춘다'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rehearse(동사)/rehearsal(명사)'라 한다. 만약 피아니스트와 같이 연습을 해보고 싶으면 한국에서는 "반주 맞춰볼 수 있어요?"라고 하는데 이게 워낙 일상적인 관용 표현이라 뭐가 이상하냐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왠지 이 표현이 신경 쓰인다. '리허설'이라는 단어는 연주자들이 같이 모여서 음악에 대해 의논하면서 두 사람이 같이 납득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아가는 느낌이라면 '반주 맞춘다'라는 건 음악의 내용을 함께 알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겉껍데기를 맞추는 게 목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걍 내 개인적 느낌이지만). 누구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맞춰줘야 한다는 뜻 같기도 하고.

한국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듯 음악에서도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라 정해진 틀을 벗어나면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자기가 해본 반주자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는 소통 불가의 연주를 하기 쉽다. 사실 한국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반주를 많이 “맞추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그 이유가 음악적인 listening & leading 이 안 되기 때문에 무조건 많이 만나서 달달 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타이밍이라는 것은 연주자 둘 사이뿐 아니라 관객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유기적인 페이스(pace)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냥 둘이서 어긋나지 않기 위한 약속을 정해서 약속대로 움직이기 위해 반주를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반주를 많이 맞춰봤고 연주도 해봤다는 곡인데도 다른 반주자하고 새로 만나면 하나도 안 맞는 경우가 많다. 왜냐, 새로운 피아니스트는 그들이 한 약속이 뭔지 모르니까...

소리가 움직이는 흐름(direction)과 딕션(diction)을 이해하면 약속을 안 해도 합이 맞을 수가 있다. 양측이 자기 파트와 상대방 파트를 모두 숙지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물론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에 따라 좀 더 불같이 음악을 밀고 나가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고, 느긋한 성격이라 좀 더 여유롭게 하고 싶을 수도 있으니 그런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리허설이 필요하지만, 굳이 악보에 크레셴도 데크레셴도, 화살표(속도 높이기)와 지렁이(~ 속도 다운) 표시를 남발하며 약속을 외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내 생각에 리허설은 서로를 알아가고 친해져서 서로를 들으면서 주거니 받거니 자유롭게 연주를 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 불편한 채로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면 아다리(?)가 다 맞았더라도 좋은 연주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주로 자기 파트를 혼자 레슨받고 완성이 되었다 싶었을 때쯤 반주를 맞춘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크레셴도도 했다가 데크레셴도도 하고, 루바토도 하고 막 빨라지기도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음악을 다 만들어놓고 반주자에게 알려주는 식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런 음악적인 계획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게 피아노 파트와 연계해서 어떤 관계성을 가져서 그런 pace가 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연주가 다소 독선적(arbitrary)으로 들린다. 피아노 파트의 화성이 이렇기 때문에 이런 빌드업이 형성된 것이구나, 피아노 파트의 움직임이 이렇게 달라졌기 때문에 나도 거기에 맞춰서 같이 움직이는 거구나를 이해해 주면 좋을 텐데.


미국에서 애들이 곡을 배울 때는 리허설을 일찍 시작하는 편이다. 일단 자기 파트가 어느 정도 손가락이 돌아가게 되었다면 “리허설 한 번 해봐도 될까?” 하면서 연락이 온다. 어떤 애들은 리허설이라고 하기에는 자기가 아직 곡을 모른다고 생각해서 겸손하게 reading이라고 표현하기도 함.  아무튼 와서 피아노 파트랑 같이 해보면서 곡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파트에선 어떤 컬러가 어울리는지 파악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고 나면 자기가 혼자 연습할 때도 뭘 신경 써야 하는지 아이디어가 생기는 것이다. 리허설을 막판에 몰아서 하는 게 아니라 곡을 배우는 과정 중간에 드문드문 만나서 your 파트와 my 파트가 유기적으로 호환이 되는지 체크를 하니까 음악 전체를 속속들이(inside out) 알게 된다. 이렇게 하면 리허설 자체는 서너 번밖에 안 했는데도 연주할 때 호흡이 찰떡같이 맞는다.

곡을 이런 식으로 배워놓으면 다른 파트너와 연주를 하더라도 금방 적응할 수 있다. 미국은 땅덩이가 워낙 크니까 어디 학교에 오디션을 보러 갈 때 내 반주자를 대동해서 갈 수가 없다. 그 지역에 있는 피아니스트를 만나서 리허설 한 번 내지 두 번 하고 오디션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무슨 수로 맥락 없이 하는 걸 맞춰주겠느냐고. 한국에서야 저쪽이 무슨 짓을 하건 못 맞추는 반주자를 죄인 취급하지만 외국에서는 안 통한다. 가장 가까이에서 연주하는 반주자 한 명도 설득하지 못할 음악이면 관객을 어찌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이 피아노 파트를 알고 연주하는지 제 것만 하는지 첫 줄만 들어도 알 수 있다. 피아니스트도 마찬가지다. 나도 반주과 오디션을 보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몇 번 다녀봤는데 오디션 하루 전 날 그 동네 도착해서 각 악기 연주자들이랑 한 번씩만 맞춰보고 들어가야 했지만 아무 문제 없었다. 학교 측에서도 오디션 보는 우리한테 피해 끼치지 않도록 곡을 제대로 알고 들으면서 연주하는 사람(a.k.a. 잘 하는 사람 ㅋ)들을 제공해 준다.


한국에서도 곡을 하나하나 암기식으로 완성하는 것 말고, 곡을 읽는 능력과 자신의 의도를 표현할 줄 아는 방법을 가르쳤으면 좋겠다. 전에 다른 글에도 쓴 적 있는데 영어유치원 다니면서 달달 외워서 웅변하는 것 같이 안 했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외워서 연주하면 본인도 괴롭고 외롭다. 반주자는 연주자와 한 배에 탄 운명 공동체이다. 나와 같이 연주하는 사람이 최고로 빛날 수 있도록 가장 가까이에서 소통하고 응원하는 사람인 것을 알아줬으면. 같이 재미있게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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