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vs. 반주자

by 박보경

어제 아빠 기일이라 천안 산소에 다녀오느라 무척 바빴지만 저녁때 부천아트센터에서 열린 제임스 에네스 바이올린 리사이틀을 보러 갔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번, 5번, 9번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피아노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연주회를 '제임스 에네스 바이올린 리사이틀'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참 무식한 것이긴 한데 어제는 딱 그렇게 부르는 것이 적당한 것 같다.

글을 예쁘게 정리할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제 인터미션 때와 공연 끝난 직후 전화기에 급히 적어놓은 것을 그대로 옮긴다. 공연 리뷰라기보다는 반주를 전공하고 듀오 소나타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서 우리가 음악에 얼마나 관여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본 것으로 읽어주시면 좋겠다.




베토벤은 피아노의 역할이 특히나 크다.

사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들은 편의상 바이올린 소나타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원래는 Sonata for Piano and Violin이다. 피아노를 먼저 표시할 만큼 피아노 비중이 크다. 낭만 소나타였으면 오라이온 와이스 정도여도 좋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베토벤을 저 정도의 피아니스트랑 같이 하는 건 아무리 잘하는 제임스 에네스의 바이올린 플레잉으로도 100% 커버하기 힘든 것 같다.

베토벤은 ‘반주자’가 쳐서는 성공시킬 수 없는 곡인 것 같다. 지겨웠다. 연주를 할 때 곡의 방향, 기승전결이 죽도록 확실하게 연주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지 않으면 정말이지 관객들이 끝까지 집중하게 하기 어렵다. 베토벤은 늘 느끼는 거지만 팀에 구멍이 있을 경우 한 사람이 멱살 잡고 끌고 가기 어려운 작곡가다.

제임스 에네스의 연주는 너무 신사답다.

요즘 내가 즐겨 듣는 멘델스존 옥텟에서도 느꼈지만 제임스 에네스는 너무나 정갈하고 흠잡을 데 없지만 매력은 좀 떨어진달까? 바이올린 교본을 보는 것 같다. 송승헌보다 잭 블랙을 좋아하는 나에게 에네스 연주는 소리 이외에 와닿는 것은 많이 없었다. 그러나 바이올린 자체를 정석으로 잘하고 연주홀 어쿠스틱에 적응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은 인정한다. 베토벤 1번 처음 시작할 때 바이올린 소리는 막혀있고 피아노 소리는 시끄럽길래 ‘오늘 피아노 소리만 된통 듣다가 가겠구나’ 싶었는데 제시부 반도 지나기 전에 get the hall(연주홀을 채우는 소리 방법을 터득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 싶었다. 피아니스트가 밸런스를 잡아낸 것인 줄 알고 내심 놀랬는데 제임스 에네스가 해낸 것 같다.

참고로 멘델스존 옥텟 제임스 에네스 연주 : https://youtu.be/2M7hdjb2oVI?si=vb23yuFtexs8wWQL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쿄 스트링 콰르텟 버전 : https://youtu.be/5DY0Vi_ENi0?si=0r-pdoLUsYYXSIL4

실내악에 어울리는 홀은 따로 있다.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은 실내악 할 홀은 아님. 악기 2대로 공간을 채우기에는 홀이 너무 크다. 제임스 에네스가 올여름에 메도마운트에 왔었는데 그때는 객석이 400석 정도 되는 텐트형 공간이라서 Bach, Ysaye 등을 연주하는데 음량이 정말 딱 좋았었다. 나는 대개 공연장 뒷좌석을 선호하는데 뒤에서도 소리가 정말 잘 들리고 뉘앙스도 다 느껴졌었다. 어제 부천아트센터는 제임스 에네스가 워낙 소리 내는 법을 아는 사람이니 들리기는 하지만 관객들에게 소리가 와닿는 정도는 아니었다. 실내악의 아늑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곡을 모르는 사람들도 베토벤의 에너지를 느낄 연주였을까?

곡을 잘 아는 사람들은 잘한다고 했을 연주겠지만 곡을 모르고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잘하는 것 같긴 한데 뭐가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싶은 연주였을 것 같다. 제임스 에네스는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베토벤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바이올린으로 100% 켜낼 수 있는 사람. 그러나 정말 그 기분을 느끼며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나 흠잡을 데 없고 완벽한 신사지만 늘 예의 바른 모습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연주였다. 그리고 바지통이 너무 좁은 거 같애. 한 사이즈만 크게 입으면 좋겠다 ㅋㅋㅋ

오라이온 와이스- 소프트 페달 남용.

바이올린과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 소프트 페달을 기본으로 깔고 가니 소리의 명확도가 떨어졌다. 개인적으로는 본 프로그램 중에서는 첫 번째 곡 1번이 가장 좋았고 프로그램 마지막 곡 9번 크로이처는 너무 조심스러워서 안타까웠다. 첫 번째 곡을 하고 나서 피아노 소리가 너무 크다 생각해서 소프트 페달로 조절하기로 한 걸까 싶다.

앵콜은 정말 좋았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3악장이랑 6번 2악장을 연주했는데 이 두 곡은 정말 좋았다! 본 프로그램은 어쩌면 너무 공을 들여서 베토벤의 야생미가 사그러든 것이 아니었을까. 앵콜에 들어서서야 피아니스트의 소리가 명확해졌고 그의 personality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뒤에서 반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치고 나가기도 하고 드디어 equal partner로 연주를 하는 것 같았다. 앙상블을 많이 하는 피아니스트에게 때론 위험한 것이 지나친 조심성이다. 오라이온 와이스도 미국에서 실내악 및 반주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너무 제임스 에네스의 스포트라이트 밖에 서있으려 하는 것이 아쉬웠는데 앵콜에서는 거침없이 그냥 치니까 듣고 보는 것이 즐거웠다. 부담감을 내려놓고 즐기듯 연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라이온 와이스에게는 정말로 미안한데, 그의 연주가 내 마음에 쏙 들게 좋았더라면 솔직히 내가 좀 슬펐을 것 같다. 그가 뉴욕 링컨센터에서 연주하는 것도 여러 번 봤었는데 사실 그 당시에 큰 인상을 받지는 못했었다. 이번에 시간이 없는데도 굳이 이 연주회에 갔던 이유는 오라이온 와이스가 궁금해서였다. 제임스 에네스 연주는 이미 여러 번 봐서 굳이 또 볼 필요는 없었는데 오라이온 와이스는 나랑 동년배이기도 하고 앙상블 연주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서 지금쯤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가 궁금했다. 내가 뉴욕에서 그에게 받았던 인상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에 내심 안도했다고 하면 내가 너무 못된 걸까? 반주자라는 아이덴티티는 음악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내가 미국에서 돌아오길 잘했다 생각하게 해줬다... 내가 계속 뉴욕에 있었으면 나도 반주자라는 포지션에 머물러 있었을 테니까.

예술인 카드라고 이쪽 업계 종사자에게 티켓 30%를 할인해 주는 카드가 있다. 나도 그거 핸드폰 어딘가에 다운받아 놓은 게 있는데 저장 위치를 못 찾아서 티켓 할인은 못 받았지만 정말 좋은 공부였어서 7만원이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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