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늘 열심히 했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성실한 노력파라고나 할까? 공부도 열심히, 피아노 연습도 열심히, 학교를 졸업해서 시험이 없어진 후에는 굳이 프랑스어, 일본어 학원에 등록까지 해가며 열심히 했다. 지난주에는 학교 수업 때문에 PPT를 만들다가, 별것도 아닌 그림 하나가 마음에 안 들어서 AI한테 재차 고쳐 그려달라고 하느라 1시간을 허비한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왜 이럴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튼 나는 남들은 아무도 모를 일에도 치열하게 매달리며 쓸데없는 장인 정신을 발휘하는 가성비 제로의 인간이다. 몸이 힘들다 싶을 만큼 하지 않으면 열심히 하지 않은 것만 같아서 불안하다.
이런 나의 2026년 목표가 열심히 살지 않기이다. 내가 사람들한테 이 계획을 말했을 때, 거의 대부분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ㅋㅋㅋ 절대 못 한다!"
그래서 내가 내놓은 타협안이 '열심히 살지 않는 걸 열심히 하기'일 정도면 내 캐릭터가 좀 감이 잡히는가?
해야 될 일을 미루고 놀아본 적 없는 나. 쉬운 일 vs. 어려운 일 중에서는 늘 어려운 일을 골라서 스트레스 이빠이 받은 후 성취감을 느끼는 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겠지만 계속 이런 완벽주의 모습으로만 살고 싶지는 않다. 모범생으로 살아봤으니 이제는 여유롭고 한가한 바이브를 더해야 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실은 작년에 서울국제음악콩쿨 반주를 하고 나서 모니터링을 하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마음에 쏙 들었던 모범적인 일본 참가자랑 했던 연주보다, 너무 준비 안 된 것 같고 헐랭이 같아서 짜증 났었던 유럽 참가자와의 연주가 모니터링을 해보니 훨씬 좋았던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느슨함, 여유라는 것을 크게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동양적인 성실함은 나에게 이미 장착이 되어있으니 유러피언의 한가로움을 더해야 밸런스가 맞을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열심히 살지 않으려고 올해의 목표를 그리 정했다. (성실치 않으려는 이유가 너무 성실하지 않은가. 어쩔 수 없는 나란 인간 ㅋㅋㅋ)
학생들한테도 몸이 고생하면서 열심히 치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고, 그건 그냥 내가 열심히 했다는 자기만족일 뿐이지 듣는 사람에게는 재미없고 피곤한 연주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하는 것은 서양 음악인데 한국식으로 열심히 하지 말라고. 완전히 다른 문화라는 것을 늘 강조하면서도 사실 나도 근면성실이 몸에 밴 한국 사람이라 룰루랄라 즐기는 것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이번 세시반 콘서트의 목표도 열심히 치지 않기이다!
'열심히 살기 않기' 도전은 나에게 쉽지 않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시시때때로 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보낸 나의 30대는 정말 치열했다. 스케줄 자체도 많고, 연습도 진짜 많이 할 때라 번아웃 오기 직전 정도 되면 잠깐 땡스기빙 방학, 숨 돌리고 다시 '아으 죽을 것 같다' 싶을 때쯤이면 크리스마스 방학... 이런 식이었다. (그 와중에 미국 학사일정 기가 막히게 잘 짰네 싶었다는. 사람 살려주는 방학 타이밍!)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다. 젊어서 가능했겠지 지금은 하래도 못할 것 같지만 그때의 열정이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서 보내는 나의 40대는 30대 때와 비교하면 훨씬 프리하다. 지금은 일주일에 학교 몇 번 나가고, 연주 준비하고, 간간이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 몰아서 바쁜 거지 기본적으로는 여유롭다. 예전에 꿈꿨던 대로 티칭과 내 음악회를 하고 있고, 내 시간을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삶의 질은 분명 좋아졌는데 이 여유가 불안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예전의 나는 훨씬 더 열심히 살았었는데 지금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아이가 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한 게, (결혼을 한 게 부러운 건 아니고) 아이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이 부럽다. 시간을 쪼개서 여러 할 일을 해내면서 사는 것이 대단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러운 포인트.
그러다 문득 내가 아이를 낳아 키웠으면 큰일 났을 뻔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열심히 하려고 했을 거야. 숨 막히는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멀티가 안 되니까 결혼을 했다면 전업주부가 되었을 텐데, 그럼 내게 주어진 육아의 임무를 최선이라는 명목으로 빈틈없이 해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게 애들 망치는 지름길인데. 어휴 결혼하지 않기를 천만다행이다 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내가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 중이다. 완벽주의를 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와 자존감을 요구하는지 알게 됐고, 내가 정말 성질 급한 인간이라는 것도 새삼 느끼면서 조급함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연말쯤엔 보다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