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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인분공부 Jul 27. 2020

편집장과 경영자 사이

어떤 업계든 마케팅이나 영업 출신이 창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출판계도 오프라인 영업이 복잡했던 시절에는 영업자가 창업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고 한다. 출판계 선배들의 얘기로는 출판 유통이 몇몇 대형서점과 도매업체로 집중되면서 편집자 출신들도 유통과 거래처를 관리하기 수월해졌다고 한다. 이런 흐름을 타고 2000년대부터 편집자가 창업하는 신생 출판사들이 급증했다.      


대체로 유능한 편집자가 편집장이 된다. 대체로 유능한 편집장이 출판사의 경영진이 된다. 출판계에서는 다니던 회사에서 임원으로 승진하기보다는 스스로 창업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럼, 그 유능했던 편집장은 유능한 경영자가 될 수 있을까?     


경영학에서 유명한 ‘피터의 법칙’은 회사의 주요 직책이 무능한 사람들로 채워지는 현상을 설명한다. 실무를 잘하던 사람을 관리자로 발탁한다. 그 일을 잘하면 더 상위직으로 승진한다. 즉, 현재의 직책을 잘 수행할 수 있는가가 기준이 아니라 과거에 하던 일을 잘했는가 여부로 직책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사람들은 무능해질 때까지 승진한다는 것이다. 관리자나 전문경영인이 무능하면 해고하면 된다. 물론 그 전까지 부작용이 크겠지만. 그런데 창업가는 무능해도 해고되지 않으므로 직원들이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한편, 유능한 편집자가 무능한 편집장이 되었다고 해서 해고해야 할까? 애초에 잘하던 일을 계속 하게 하면 된다. 


어떤 출판사에서 편집장의 경력이 20년이 넘고 경영자가 오래 전에 기획과 편집 실무에서 멀어졌다면 그 경영자가 과거에 아무리 뛰어난 편집자였다고 해도 현재는 편집장이 더 전문가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여러 분야 편집팀을 운영하는 출판사라면 경영자가 해당 전문 분야 편집장들보다 그 분야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유아그림책, 아동문학, 학습만화, 청소년교양, 성인단행본, 여성실용 부문을 운용하는 출판사라고 할 때, 어떤 경영자도 해당 분야 편집장들 모두보다 그 분야를 더 잘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경영자가 그중 한 분야에 정통할 수는 있다. 하지만 회사의 전체 경영을 책임져야 하니 자신이 잘 아는 그 분야 하나에 집중할 수는 없다.      


경영자가 되어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편집자 또는 편집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사내의 편집장들이 자신보다 더 전문성이 높다는 것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들은 경영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편집장의 정체성을 잃는 순간 자신의 권위가 추락한다고 여긴다. 편집권에 속하는 문제에 대해 경영자가 더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걸 인정받고 싶어 한다. 출판사뿐만 아니라 리더의 권위가 그 분야 실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데서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경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현장 책임자와 역할을 혼동하는 것이다. 내가 실무 책임자보다 실무를 더 잘 아니 내가 결정한다, 이런 식이다.      


경영자가 최고 의사결정권을 지니는 것은 각 실무 분야에 대해 가장 잘 알아서가 아니라 각 부서장이 부분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업무를 경영자는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회사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권리를 갖고 그 결정에 대한 최종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리더가 실무 책임자와 경쟁하는 것은 출판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출판계에서 더 심각한 것 같다. 일반 기업에서는 경영관리가 중시되는 데 비해 출판사에서는 그런 걸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이 팽배하다 보니 출판 경영자조차도 경영의 개념이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들을 자주 보았다.      

물론 10인 이내의 작은 회사라면 편집장을 채용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경영자가 편집장 역할을 겸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10인 이상 규모의 회사에서 편집장과 경영자의 역할을 제대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조직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힘들다.      


경영자는 경영자만이 할 수 있는 장기 전략과 대형 기획, 부서 간 업무 조정, 인사 제도 등 회사 시스템 정비, 새로운 사업 기회 탐색 등 전반적인 경영 활동에 전념해야 한다. 경영은 특정 목적을 위해 여러 자원을 조직적으로 결합하여 효과성을 극대화하는 활동이다. 경영은 특정 분야의 실무를 잘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활동이다. 인간의 본성을 잘 이해하며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사람들이 경영에 적합하다. 경영자에게 필요한 능력은 스스로 실무를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실무를 잘하는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다.      


무너진 편집권     


자신을 편집장으로 여기는 경영자는 편집장이 일을 잘해도 시기하고 질투한다. 편집의 전문성 면에서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직원들 앞에서 일부러 편집장을 깎아내리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편집권에 속하는 아주 자잘한 사항들도 일일이 경영자의 허락을 받게 해서 결과적으로 편집장의 지시를 무력화시킨다. 조직관리의 개념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부서장의 지시를 무력화시키면 조직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편집장의 지시는 지시가 아니라, 편집자들이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조언이 된다. 어차피 진짜 지시는 경영자가 내리는데, 경영자가 문제 삼지 않으면 편집장의 지시는 무시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지적과 조언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편집장이 열심히 실무를 챙기면 챙길수록 쓸데없는 잔소리꾼이 될 뿐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출판사에서 이처럼 편집장의 권위가 무너지면 도서들의 방향성과 퀄리티를 조율하기가 힘들어진다. 경영자가 편집장의 권한을 빼앗더라도 편집 실무를 일일이 챙길 수는 없기 때문에 전반적인 조율 기능이 망가진 상태에서 편집자가 각자 알아서 자신의 방식대로 책을 만들게 된다. 원고의 수준이나 편집의 품질도 천차만별이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책들이 출간되는 것이다.   

   

심지어 명백하게 틀린 내용을 표지와 띠지에 기재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한 편집자는 유명 베스트셀러를 재출간하며 표지에 해당 책이 우리나라에서 200만 부 팔렸다고 기재했는데, 기존 출판사는 100만 부 팔렸다고 공표했었다. 그 편집자는 그 책의 기존 판매부수를 확인하지도 않고 맘대로 뻥튀기해서 그것을 띠지도 아니고 표지에 기재했다. 당연히 해당 출판사와 문제가 생겼다. 자칫하면 해당 도서의 저자 혹은 해외 저작권사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편집자는 학술적으로 명백하게 틀린 내용을 띠지 카피로 넣었는데, 내가 지적하자 너무도 당당하게 ‘이렇게 써야 책이 잘 팔린다’고 주장하며 편집장의 지적을 가볍게 무시했다.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


편집권이 무너진 출판사에서는 ‘책을 많이 팔아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과대포장을 넘어선 명백한 허위도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판단의 기준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사실과 거짓의 경계도 가볍게 넘길 정도니 편집의 전문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여지가 없다. 편집의 기본이 무엇인지, 좋은 편집이란 무엇인지 기준 자체가 부재한 상태에서 각자 맘대로 생각하게 된다.      


편집자가 전문직이라면 전문성을 확보하기까지 상당한 수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편집권이 부재한 출판사에서 미처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갖추지 못한 편집자들은 기준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전문성의 차이’를 단순히 ‘의견 차이’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3년차 편집자도 20년차 편집장이 편집상의 문제를 지적하면 ‘그건 당신 의견일 뿐이고’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흔하다.      


요즘에는 어떤 종류의 권위든 부정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권위에는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가 있다. 나이가 많다고 반말을 하고 지시를 하는 것은 비합리적 권위지만, 회사의 공식적인 직급 체계나 업무의 전문성에 기반한 권위는 합리적 권위다. 우리가 3년차 의사가 아니라 20년차 의사에게 수술받고 싶어 하는 것은 전문 직종은 개인차가 있더라도 오랜 기간 집중적인 훈련을 거쳐야 진정한 실력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편집 업무에서는 전문성의 차이가 생명을 좌우하지는 않지만, 전문성에 기반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편집자라는 직업을 전문직이라고 할 수 없다. 전문가와 초보의 차이를 ‘의견 차이’로 여기는 편집자는 전문성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20년차가 되어도 전문성을 갖추기 어렵다.      


어떤 책을 어떻게 만들지 공유하는 원칙이나 기준 없이 각자 마음대로 한다면 그 출판사는 독자의 신뢰는 물론 정체성을 상실한다. 나오는 책마다 대상독자가 다르고, 도서 성향과 품질이 천차만별이라면 그 출판사나 출판 브랜드는 고비용 저효율의 마케팅과 홍보 활동을 해야 하고 브랜딩에 실패하게 된다. 그럼 특정 책을 쓴 저자와 그 책을 만든 편집자만이 그 책의 품질을 책임지게 된다. 즉, 책의 성공은 저자와 편집자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으니 그 출판사는 아무 경쟁력이 없다. 조금만 조건이 안 맞으면 저자와 편집자는 다른 출판사로 옮길 것이고 창업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사태가 이어지면 회사가 어려워지고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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