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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인분공부 Jul 20. 2020

편집장이 사라진 출판사

조직에서 중간관리자의 역할은 전체를 지휘하는 경영진과 현장의 실무자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수뇌부와 현장의 정보를 취합해 올바른 의사결정에 기여하고 조직의 목표를 현장의 말단까지 실천하도록 함으로써 조직이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편집장은 대체로 그 출판사에서 가장 전문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중간관리자들보다도 훨씬 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한다. 예전처럼 기획과 편집의 일관성 및 일정과 품질 관리를 맡는 것은 물론 현재는 상품성 높은 기획과 편집으로 매출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이 가장 중시되고 있고 편집자 교육과 훈련까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 기업으로 치면, 공장장 + 연구개발 + 상품기획 + 인사, 교육을 동시에 담당하는 셈이다.   

   

그러나 편집장은 업무량과 책임에 비해 대가가 낮고 직업 안정성도 낮아 인기 없는 직업이 되어 버렸다. 편집장을 할 만한 사람들은 창업을 하거나 업계를 떠나 많은 출판사들은 편집장을 구하지 못한다. 편집자 중 여성 비중이 매우 높은데 아이를 낳으면서, 또는 양육 과정에서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편집장을 구하기 어려운 중요한 이유이다. 인지도가 높은 출판사들조차 편집장을 구하지 못해 편집장이나 편집팀장 자리를 몇 년씩 비워 두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역량이 부족한 사람을 앉히기도 한다.      


내가 10명의 팀원을 거느린 편집팀장이었을 때 내가 아는 몇몇 편집자들은 1인 팀장으로서 나와 비슷한 급여를 받았다. 몇 배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같은 급여를 받는다면 그런 일을 왜 할까? 그렇게 일하면서 임원이나 전문경영인으로 승진하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조직 속에서 성장하고 인정받으며 장기적으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편집장을 그만두는 이유     


편집장의 직업 안정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영자와 너무 가까이 일하기 때문이다. 의견이 자꾸 엇갈리고 방향성이 다르면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만두게 된다. 물론 능력이 부족하다고 경영자가 판단해서 해고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원래의 편집장을 대체할 능력자가 경영자 주변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편집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해고하지는 않고 계속 갈구다가 서로 감정이 나빠져서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많다.      


편집장은 경영자의 측근이 되기 어렵다. 누군가의 측근이 되려면 자기 의견이 없어야 하는데, 편집장은 업무 성격상 주관이 뚜렷할 수밖에 없고 기획과 편집 과정에서 가치 판단을 하는 게 주 업무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오랫동안 편집장을 역임했던 사람은 편집장 역할은 하지 않고 권력자의 심기를 잘 살피는 사람이었다. 해외 도서전 출장에서 일행 몰래 자기 혼자 경영자에게 줄 선물을 샀던 일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실제로 하는 일은 주로 행정적인 업무에 국한되었고, 진짜 편집장 역할은 각 팀장들이나 주간, 실장 같은 사람들이 수행했다.      


신규 사업이나 마케팅에 주력하는 경영자들을 만나면 한결 편하다. 나 역시 항상 신규 사업 아이디어가 넘치던 워커홀릭 경영자와 함께 일할 때 가장 편했다. 경영자가 잠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바빠서 편집에 거의 관여를 안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실무에 별로 간섭하지 않는 대신 인사관리는 철저히 했다. 일을 잘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내버려 두고, 일을 못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해고했다. 마치 무능한 직원들을 모두 제거하면 유능한 직원들만 남는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미국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부작용이 크다.      


반대의 경영자도 있다. 잘하는 놈만 골라서 패라는 주의다. 그 원칙은 나한테도 적용한 것 같고, 나에게도 직원들을 그렇게 대하라고 했다. 돈 될 만한 기획을 물어올 만한 직원들을 골라서 더 패라는 것이다. 매출 성과를 따지면 편집자별 차이가 매우 크다. 성과가 높은 직원을 칭찬하기는커녕 더 질책하기도 했다. 더 할 수 있는데, 안 한다는 것이었다. 급여와 성과급 차이가 미미한데, 잘하는 놈만 더 패라니 동의할 수 없었다. 그 경영자는 연봉 협상에서도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불공평하고 우유부단하게 대처했다. 어차피 직원들이 오래 다니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든 있을 때 최대한 이용하자는 주의인 것 같았다.      


중간관리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경영자들이 일반 사원들 앞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인상적일 정도로 전혀 신경 안 쓰는 경영자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많은 경영자들이 직원들에게는 친절하고, 팀장급 이상의 중간관리자들만 집중적으로 갈군다. 팀장급을 갈구는 것은 결국 팀원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인데, 경영자가 아닌 중간관리자들이 악역을 맡으라는 뜻이다.      


중간관리자가 악역을 떠맡으면 직원들의 원성을 중간관리자에게로 돌릴 수 있다. 그 상황을 계속 활용할 수도 있고, 회사에 문제가 생기거나 직원들의 불만이 커지면 그 중간관리자를 내치는 것으로 일단 사태를 무마할 수 있다. 중간관리자의 용도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하던 관리자가 사라지면 경영자와 직원들 사이의 대립이 극심해져 직원들이 뛰쳐나가는 경우들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이용당하면서도 중간관리자를 하려면 그만큼 이점이 있어야 한다. 급여가 높다든지, 권한이 막강하다든지 뭐라도 있어야 하는데, 회사 조직이 수평적으로 바뀌면서 그런 이점들이 상당히 사라졌다.  

    

요즘에는 작은 회사들도 인트라넷이나 전자결제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영세한 회사라도 구글 프로그램 등을 활용하여 정보 관리와 커뮤니케이션을 효율화할 수 있다. 예전에는 층층이 결재를 받고 정보를 전달하는 게 중간관리자의 주 업무였으나 이제는 그런 업무의 필요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중간관리자들의 실무 비중이 크게 늘었다. 기존의 행정관리 업무에 더해 실무자들만큼 많은 실무를 해야 한다. 인력이 부족한 출판사는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인터넷을 이용하면 되는 일들을 경영자와 직원들이 귀찮아해서 실제로는 이론만큼 행정관리 업무가 줄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경영자는 직접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일일이 보고받길 원하고 그것도 보기 좋은 보고서 형태로 보고받기를 원한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와 현대카드 정태영 대표가 파워포인트 문서로 보고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기사를 보고, 역시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느꼈다.      



경영자뿐만이 아니다. 직원들과 동료들 역시 인트라넷의 공지사항이나 이메일로 공유한 사항들도 일일이 그때 그때 지적하고 일러줘야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결과 실무와 관리를 병행해야 하는 중간관리자들의 업무 부담이 급증했다.      


나 역시 늘 관리와 실무를 병행해 왔는데, 그 이유는 다소 복잡하다. 그렇게 강요받은 측면도 있지만, 사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관리는 아무리 잘해도 인정받기 어렵다. 사람들은 관리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관리는 잘할 때가 아니라 못할 때에만 이슈가 되고, 그 문제가 중간관리자의 직접 책임이 아닐 때도 그렇다.      


그러니 유능함을 인정받으려면 편집장조차 스스로 기획하거나 편집해서 실무를 담당한 책을 내세워야 한다. 그 결과 편집장이면서도 부하 편집자들과 경쟁하고 동시에 그 편집자들을 최대한 지원해야 하는 모순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러면서 실무자가 베스트셀러를 기획하면 거기에 묻어간다고 비난받고, 스스로 베스트셀러를 기획하면 부하들과 경쟁하며 자신의 실적만 신경 쓴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뭘 하든 비난받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대표와 편집장이 기획을 전담하거나 한정된 분야의 시리즈물을 출간하는 출판사들은 이런 문제에서는 비교적 자유롭다.      


출판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업계 종사자들에게도 비슷한 얘기들을 들었다. ‘부하직원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 없이 내 실적으로만 평가받고 싶다, 중간관리자가 하는 일을 인정받지 못한다, 전문성이 높을수록 관리자가 되기를 싫어 한다’ 등등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동안 출판사에서 일하며 시장이 안 좋고, 책이 안 팔린다고 고민하기보다는 주로 조직의 문제로 고민해야 했다. 외부 상황을 고민하기에 앞서 내부 문제들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출판사 조직의 문제는 편집장의 역할이 사라지고, 아예 편집장 자체가 사라지는 현상으로 표면화되어 왔다.    

  

다음 글에서는 출판사에서 편집장과 경영자가 충돌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를 다룬다. 바로 편집장 출신의 경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편집장으로 여기면서 빚어지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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