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인분공부 Jun 28. 2020

기획력은 판을 읽는 안목에서 나온다


기획자는 이 시대의 가장 첨예한 이슈가 무엇인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관심사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문화산업의 기획자에게는 증권사 애널리스트나 일반 기업의 전략기획자와 비슷한 능력이 요구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거대한 변화는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변화다. 이 용어를 꺼리는 사람도 있고, 거의 유사한 의미로 ‘디지털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몇 년 전 ‘4차 산업혁명’이 한창 유행할 때는 당장 세상이 뒤바뀔 것 같았지만, 우리의 일상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거대한 변화는 몇 년 단위로 보면 잘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십 년에서 수십 년 단위로 보면 인류의 삶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는다.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이라는 게 있었다. ‘닷컴’이 붙은 인터넷 기업들에 일반인들도 마구잡이로 투자해서 거대한 버블이 형성되었다. 인터넷 기업들이 아무리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도 사람들이 돈을 내고 보는 건 포르노 외에는 별로 없었고, 광고 수익 말고는 딱히 수익모델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기업들이 많았다. 누구나 이용하는 대형 포털 사이트는 광고 수익이 엄청났지만, 다수의 인터넷 기업들은 운영이 어려웠다. 


 하지만 닷컴버블이 꺼진 후에도 세상은 계속 ‘디지털화’되어갔다. 드디어 손 안의 컴퓨터, 스마트폰이 출시되었고, 온라인이 오프라인 세상을 집어삼키는 O2O(Online to Offline, 카카오택시나 배달의민족 같은 사업 모델) 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에 단타로 투자하면 돈을 잃기 쉽지만, 장기적으로 투자하면 큰 부를 이룰 수 있다.      


대박이 되는 시점     


변화의 흐름을 알더라도 어느 시점에 투자하고 어느 시점에 빠져야 할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주식 투자에서는 가치 투자, 장기 투자를 강조한다. 도서 기획도 마찬가지다. 흐름을 꿰고 있어도 정확히 어느 시점에 흥행이 될지 맞추기는 어렵다.     


최첨단 학문을 개인과 비즈니스를 위한 실용적 지식으로 녹여 내는 장기로 유명한 맬컴 글래드웰은 『티핑 포인트 The Tipping Point』에서 어떤 트렌드가 대세가 되는 조건을 탐색한다. 어떤 변화는 단기간 유행으로 끝나지만 어떤 변화는 세상을 바꾼다. 변화의 에너지가 계속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판이 바뀌고 바로 이 순간이 모든 기획자가 꿈꾸는 대박의 순간이다.      


4차 산업혁명이 대세라면 도서 기획에서 대박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디지털이다 Being Digital』는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르는 일련의 변화들을 예견한 도서로 손꼽힌다. 원서는 1995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서는 1999년에 출간되었다. 당연히 대박이 될 수 없었다. 대중의 인식보다 너무나 앞서간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성공한 기획이다. 1999년에 출간된 책이 아직도 팔리고 있고 오피니언 리더들이 지속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특이점’을 다룬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 The Singularity Is Near』는 원서가 2005년, 번역서가 2007년 출간되었다. 이 책 역시 대박까지는 아니었지만, 과학 분야 도서로는 상당히 많이 팔렸고 지금도 잘 팔리고 있다. ‘특이점’은 이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쓰이는 대중적인 용어가 되었다.      

2014년 원서와 번역서가 출간된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의 『제2의 기계 시대 The Second Machine Age』는 미국 아마존 베스트셀러,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번역 판권 선인세도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내 판매는 미국에 비해 높지 않았다. 경제경영 베스트셀러였지만, 대박까지는 아니었다.      


대박은 2016년 출간된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었다. 안타깝게도 가장 많이 팔린 책이 가장 좋은 책은 아니다. 각 분야에서 따로따로 이루어지며 융합되기도 했던 다양한 변화의 양상들을 총체적으로 버무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자 대중에게 다가서기 쉬운 솔깃한 개념이 되었다. 다보스포럼 의장으로 재직하며 오랫동안 세계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클라우스 슈밥’이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이 주제는 국내에서도 경제계 전반의 이슈로 떠올랐다. 이때 마침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4차 산업혁명’이 대중문화에서도 대세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나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서 2015년 『4차 산업혁명 시대 전문직의 미래 The Future of the Professions』(2016년 국내 출간), 2016년 『대량살상 수학무기 Weapons of Math Destruction』(2017년 국내 출간)을 기획했다. 영미권 경제경영서는 주목받는 이슈라면 선인세가 수익을 내기 거의 불가능한 수준까지 올라가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이 책들은 계약 당시 국내 출판사들의 관심이 높지 않아 무난한 선인세로 계약했고, 대박까지는 아니었지만 두 책 모두 투자 대비 아주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흐름을 알고 있더라도 대박을 만들기는 어렵다. 대박을 예측하는 사람들이 여럿이라면 투자금이 높아져 리스크가 커지고 많이 팔려도 남는 게 없을 수 있다. 대박을 예측하려 하기보다는 대세를 알고 그 흐름에 따라 무리하지 않은 투자를 하면 도서 기획에 성공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책들은 대세를 따랐기에 모두 성공한 기획들이다. 투자금(선인세)이 과도했다면 손실이 났을 수도 있지만, 재정 상태가 나쁘지 않은 회사라면 시대를 선도하는 책을 출간해서 어느 정도 손실을 보았다 해도 브랜드 이미지 제고나 후속 기획으로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큰 흐름을 읽는 것이 기획에 성공하는 길이다.     


대중의 눈높이와 속도에 맞춰라     


2019년 나는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 Gigged』라는 책을 보고 ‘아차’ 싶었다. 외서들을 검토하며 지나쳤던 타이틀이었는데 당시 나는 식상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플랫폼 경제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수년 전부터 익숙한 주제여서 ‘뒷북’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 책의 성공을 보고 내 잘못을 깨달았다. 플랫폼 경제가 아무리 많이 다루어진 주제라 해도 그것이 낳은 고용 문제를 우리나라 대중이 실감할 정도가 되려면 시차가 있다. 대중보다 한발 앞서 열심히 기획하다 보면 독자에게는 신선한 주제를 기획자는 진부한 주제라고 느낄 수 있다. 관심은 앞서가더라도 결정을 내릴 때에는 철저하게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편집자는 걸어다니는 출판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