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인분공부 Jun 24. 2020

편집자는 걸어다니는 출판사

오늘날 편집자의 역할을 총체적으로 표현하자면 PD(producer), 혹은 일종의 프로젝트 매니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출판사마다, 편집자마다 큰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우수한 편집자라고 평가받는 사람들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거기에 맞는 팀(저자, 번역자, 담당 디자이너, 담당 마케터, 외주 편집자 등)을 꾸리고 운영해서 성과를 내는 일까지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이 일을 전반적으로 잘한다면 편집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 다니는 출판사라고 할 수 있다. 출판의 각 분야에 외주업체나 프리랜서가 많으므로 실제로 편집자 1인으로 이루어져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마다 외주자들과 팀을 꾸려 협업하는 1인 출판사들도 많다. 가장 이상적인 편집자는 영화감독처럼 전문가적 역량과 사업가적 역량이 고루 발달하고, 기획력과 추진력, 실행력을 모두 갖춘 사람이다.      


프로젝트의 시작은 기획이다. 출판사에 따라 대표가 기획을 주도하거나 편집장, 기획위원들이 기획을 주도하기도 하고, 기획팀과 편집팀을 따로 두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기획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회사에 따로 있더라도 대체로 어떤 편집자든 스스로 의지가 있으면 기획에 참여할 수 있다.      


기획과 편집을 무 자르듯 나눌 수는 없다. 편집 경험이 많아야 현실성 높은 기획을 할 수 있다. 한편, 기획은 그냥 간단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저자와 작업자 섭외, 원고의 구성과 내용, 문체, 편집 스타일, 시장 론칭 전략을 포괄하는 일이다. 기획력은 책을 출간할 때까지 모든 편집 과정 전반에서 필요한 능력이다. 기획자와 편집자를 나눈다면 여러 부분에서 역할이 중복될 수 있다. 기획팀이나 기획위원 제도를 따로 운용하는 회사에서는 기획안과 저자 섭외, 계약까지 또는 초고 입고까지를 기획으로 보고 이후 과정을 편집팀에 이관한다.      


그럼 어떤 책을 기획해야 할까? 명확한 출간 방향이 있는 출판사들도 있지만 대개 주력 분야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는 자유롭게 기획하는 출판사들이 많다. 시장 상황에 따라 주력 분야를 바꾸기도 한다. 대중소설로 사세를 확장한 회사가 경제경영서로 명성을 얻고 어느 순간 인문서 중심 출판사가 되기도 한다. 기획자는 자신이 속한 출판사의 성향과 역량에 맞춰 상업성과 작품성을 저울질하며 구체적인 아이템을 선별한다.      


대중문화 기획은 사회학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해외의 트렌드를 살피고 그 트렌드가 우리나라에 들어올지, 언제쯤 들어올지 판단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뜨는 이슈라도 책으로 출간해서 꼭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이슈들을 인터넷에 넘쳐나는 글들과 동영상, 방송 프로그램으로 소비한다. 시간과 돈을 들여 책을 사서 볼 정도가 되려면 해당 주제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이나 이해관계가 있어야 한다.      


도서 판매부수 통계는 영화 관람 통계처럼 투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납본 통계와 문화유통북스 같은 물류업체 통계를 보면 대부분의 책들은 1년간의 판매부수가 2천 부를 넘지 않는다. 사회정치 분야나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1년 판매부수가 5천부 정도인 책은 분야 베스트셀러가 된다. 즉, 해당 분야 대부분의 책들은 5천 부 미만의 판매 실적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문 분야나 소설 분야처럼 판매 사이즈가 큰 분야가 만만한 것도 아니다. 그런 분야는 발행종수, 즉 경쟁도서가 엄청나게 많아 역시 대부분의 책들은 판매가 미미하다.  

    

제작비가 적게 드는 책은 손익분기점이 2천 부에 형성되기도 하고, 선인세나 계약금, 마케팅비가 많이 투자되는 책은 수만 부가 손익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독서율과 가구당 도서구입비 평균이 계속 낮아지고 출판시장 자체가 축소되는 상황에서는 종당 판매부수를 높이려는 전략만으로는 어렵고 운영 효율을 높여 제작비와 간접비를 낮추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인건비를 줄이는 게 쉬운 방법으로 여겨지겠지만 출판산업은 우수한 인력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좌우하므로 인건비가 싼 노동력을 활용하기도 어렵고 사회 전체에서 노동조건에 대한 기대치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으므로 이는 더 이상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다. 경영 시스템 전반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대형 아이템 기획과 가성비 중심 기획     


회사의 경쟁력이 아니라 편집자의 역량에 좌우되는 요소들을 통해 편집자의 능력을 알 수 있다. 회사원의 처세를 다룬 자기계발서들에서 항상 강조하는 내용이지만 회사의 능력과 자신의 능력을 구분해야 한다. 이 회사 명함이 없더라도 그 저자를 섭외할 수 있을지, 이 회사의 자금력이 없이도 그 외서를 계약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대형 출판사, 자금력이 있는 출판사라도 모든 책을 대박을 노리고 기획하지는 않는다. 나도 대형 기획과 가성비 좋은 실속 있는 도서 기획을 병행했다. 대형 기획은 소속 회사의 명함과 자금력으로 섭외 가능한 수준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혹은 가장 매력적인 콘텐츠를 지닌 저자, 회사가 감수할 수 있는 수준에서 높은 선인세를 지불해야 하는 외서, 오랜 기간 많은 제작비를 투입해야 하는 시리즈 등을 대상으로 한다. 가성비 중심 기획은 인지도가 별로 없거나 신인인 저자의 책을 기획하거나 높지 않은 선인세를 지불하고 계약할 수 있는, 다른 출판사에서 별로 관심이 없는 외서를 계약해서 번역 출간하는 것이다.      


수십만 부가 판매되는 책을 기획, 편집하는 것도 뿌듯하지만, 투자비가 적은 가성비 중심 기획을 통해 5천 부에서 수만 부까지 판매하는 것도 정말 뿌듯하다. 별로 주목받지 못한 아이템으로 좋은 성과를 낸다는 것은 그 편집자에게 시장에 대한 촉이 있음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경쟁이 극심한 업계에서 투자 대비 좋은 성과를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능성이 있다 싶으면 너도나도 달려들기 때문이다. 가성비 중심 기획은 회사의 지원이 적을 때라도 편집자의 역량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준다. 또한 투자금이 적다고 해서 적은 수익만 올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적은 투자로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내가 기획한 도서 중에는 무명 저자의 데뷔작인데 7만 부 이상 판매된 경우도 있었고, 1만 5천 달러의 선인세에 계약한 외서가 10만 부 이상 판매된 경우도 있었다. 

     

홈런 한 번을 치는 것보다 안타를 계속 치는 능력, 타율이 중요하다. 또한 똑같은 재료로 더 맛깔난 요리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중요하다. 저자와 원고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고, 별로 특징이 없어 보이던 원고를 설득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내고, 저자가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도록 원고의 표현 방식을 효과적으로 조율하는 능력이 관건이다. 무식하게 표현하자면 편집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3천 부 팔릴 책을 5천 부 사이즈로 만들어내고, 5천 부 사이즈의 책을 1만 부 사이즈로 만들어내며 1만 부 사이즈의 책을 3만 부로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베스트셀러 기획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