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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인분공부 Sep 30. 2020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

분열된 미국을 향한 통합의 메시지

내가 이 책을 담당했을 때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였다. 그때 오바마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담대한 희망’을 주제로 기조 연설을 해서 스타 정치인으로 떠올랐지만, 경선 직전까지도 힐러리를 제치고 민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당시 다른 팀에서 떠오르는 스타 정치인 오바마의 두 책,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과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계약했는데, 팀별 분야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우리 팀이 그 책들을 맡게 되었다. 미국 정치가 워낙 판매가 낮은 분야이고,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낮은 정치인의 책이라서 국내에서 많은 판매를 예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둘 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책들이었지만 선인세는 별로 높지 않았다. 규모가 있고 자금 여력이 있는 회사라면 이런 떠오르는 스타들에게 골고루 투자하는 게 좋다. 그렇게 수십 명에게 투자하면 몇 명은 터지니까. 더구나 오바마의 책은 많이 팔리지 않더라도 명분이 있고 국내 오피니언 리더들의 관심을 끌 테니 어떻게 되든 회사에 도움이 될 책이었다.      


두 책 다 만만치 않은 내용과 분량인데 출간을 서둘러야 해서 나는 딱딱한 정치서인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을 맡고, 다른 편집자가 문학성이 넘치는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담당했다.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가 떨어지면 책을 팔기 어려우므로 가능한 한 신속하게 출간해서 경선 결과가 나올 때까지의 기간 동안 부지런히 팔아야 했다. 또 경선 전에도 선거운동 과정에서 지지율과 화제성이 떨어지면 판매가 어려울 터였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미국에서 1995년,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은 2006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두 책의 문체와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오바마는 만연체로 상당히 긴 문장을 구사하는데 전자는 문학적인 글로 술술 읽히는 반면, 후자는 다소 지루하고 장황한 느낌이 든다. 그 차이가 왜 생겼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전자는 오바마가 법학대학원에 재학할 때 집필하고, 후자는 정치가가 되어 대선까지 뛰기로 결심한 후 집필해서인 것 같다. 대선주자 정치인은 문장 하나하나 계산해서 써야 하고, 조금이라도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직설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빙빙 돌려서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글의 매력과 재미는 약간 덜하다.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은 앞부분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립상을 역사적으로 파고들고, 미국을 통합시킬 정직, 신의, 책임감, 예의, 배려, 공감 등 공통의 가치체계를 탐구하며, 가치체계의 중심인 헌법의 기원과 의미를 세세하게 분석한다. 미국 정치에 해박하거나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국 독자들로서는 생소하고 지루하게 느낄 만한 내용이다. 웬만큼 진지한 독자가 아니라면 읽기 힘들 것 같아 미국 저작권사에 구성을 바꿀 수 없냐고 문의했다. 우리나라 독자들도 공감할 만한, 가족이나 교육, 복지 관련 내용을 앞에 넣고 지극히 미국적인 내용은 뒤에 넣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저작권사에서는 본문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 불가하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례적으로 표지 디자인과 표지문안도 원서 그대로 문구만 번역해서 써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뒤표지에 넣을 추천사를 국내 인사에게 의뢰해 놓은 상태였다. 저작권사의 통보를 받고 부랴부랴 그분께 연락해서 사죄했고, 나중에 책 출간 후 증정본을 발송했다. 영미권 도서는 표지나 표지문안에 간섭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국내 출판사에서 표지문안을 홍보문구로 채우고 국내 인사들의 추천사들도 받아서 넣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나는 대신 책 날개에 오바마가 왜 특별한 정치인인지 요약 정리해서 넣었다.      


오바마를 수식하는 여러 표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가 ‘보수세력과 공화당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진보주의자’라는 것이다. 공화당원들과 민주당원들이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더라도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나는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을 편집하며 국가의 통합을 위해서는 반대파에게도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뭔가 믿음이 가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것 같아”라는 신뢰를 주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두 책은 2007년 출간 후 수천 부 정도만 팔렸지만 오바마가 2008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수만 부씩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두께만큼 정가가 높은 책들이었기에 회사의 수익은 컸다. 브랜드 인지도 향상에 따른 이득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아프리카아메리카아시아를 넘나드는 미니 유엔’ 가족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오바마가 상원의원이 되기 훨씬 전에 하버드 법학대학원 재학 시절 <하버드 로 리뷰> 편집장이 되었을 때 집필했던 책이다. 당시 흑인이 그 잡지의 편집장이 되었다는 것이 엄청난 화제였다고 한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의 중간 이름 ‘후세인’이 이슬람식인 것은 그의 아버지가 케냐 흑인이기 때문이다. 1961년에 미국의 백인 여성과 케냐 흑인 유학생의 결혼은 이례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본국에 이미 부인과 자식이 있었다. 당시 케냐는 일부다처제가 용인되었다고 하니 아버지는 별 문제의식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당연히 그들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가 다시 인도네시아 남성과 재혼하면서 오바마는 한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기도 했다. 모험과 자유와 세계인의 연대를 추구했던 어머니의 결혼생활은 자녀를 양육하기에 안정적인 환경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자식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며 스스로도 주체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오바마는 어머니에 대해 직접적으로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의 화신이었던 어머니가 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명백해 보인다. <오바마, 어머니의 길>은 오바마의 어머니를 다룬 전기인데, 그녀는 개발도상국 엘리트 남성들과 두 번 결혼하고 이혼하는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속에서도 남다른 교육열로 자식들을 키워내며 동시에 인류학자이자 NGO 활동가로서 경력을 쌓아가다 52세의 한창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어쨌든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의 이력 역시 오바마의 선거운동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었을 것 같다. 선거운동 과정에서는 늘 할머니가 부각되었다.      


하와이에 사는 조부모가 주로 오바마를 양육했다. 한국 학부모 뺨치는 교육열을 지닌 어머니와 조부모는 경제적으로 무리를 해가며 학비가 비싼 명문 사립학교에 그를 보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 대마초를 피우며 허송세월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왜 재능을 낭비하냐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 오바마는 공부에 전념해서 명문 컬럼비아대학교에 편입하고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입학한다. 아마도 자신의 경험 때문에 미국이 한국의 교육열을 본받아야 한다고 오바마가 그토록 강조하고 다닌 것 같다.     


일반적인 미국 흑인들과 매우 다른 오바마의 성장 배경이 선거 과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가 백인 중산층 문화 속에서 성장했으므로 겉만 검을 뿐 진짜 흑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오바마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은 미셸 오바마다. ‘진짜 흑인’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미셸 오바마를 통해 그는 미국 흑인 사회 주류와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인도 흑인도 아닌 이중의 아웃사이더로서 정치가의 꿈을 이루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유권자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복잡한 가정 출신의 오바마가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미셸과 안정된 결혼생활을 해온 것도 큰 이점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가의 정체성 이전에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보면 그가 직설적으로 얘기하진 않지만 노예의 후손이 아니라 아프리카 엘리트 흑인의 아들이었다는 점이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시기에 다른 노선으로 주목받았던 말콤 엑스의 <말콤 엑스 자서전>을 보면 열등감과 무력감이 낙인처럼 새겨진 빈민가 흑인들의 분열된 자아상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에이미 추아 예일 법학대학원 교수는 <트리플 패키지>에서 미국에서 주류로 자리 잡은 이민자 집단의 특성을 방대한 연구로 분석했는데, 유대계, 인도계, 중국계, 이란계, 레바논계 등과 함께 아프리카 상류층 출신 흑인들은 미국에서 빠르게 주류에 진입한 몇몇 성공적인 집단에 속한다. 억압과 차별이 내재화되면 스스로의 가능성을 파괴하게 된다. 오바마와 그의 아버지는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난 흑인들과는 달리 그런 내면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웠다.      


아버지 없이 백인 가정에서 성장한 오바마는 주변 흑인들의 부정적인 모습과 그들에 대한 차별을 보며 주눅 들고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방문해서 오바마가 다니는 하와이의 사립학교에서 일종의 ‘일일교사’ 같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백인 학생들이 흑인 아버지를 어떻게 바라볼까 어린 오바마의 마음이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케냐에서 엘리트로 성장했던 아버지는 언변이 뛰어나 단숨에 학생들을 사로잡고 아프리카 전통음악으로 혼을 쏙 빼놓았다고 한다. 그런 경험을 통해 오바마는 주변 흑인들의 모습은 잘못된 역사 속에서 굴절된 것일 뿐이며 흑인은 절대 열등한 존재가 아님을 온몸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1등만 살아남는 냉혹한 세계가장 고단한 영업자의 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이 한 흑인 아이가 태어나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다루었다면,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은 직업 정치인의 일상과 고민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정치의 세계가 그렇게 치열하고 더럽고 잔혹하기까지 한 것은 1등만 살아남는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연예인이나 예술가는 꼭 1등이 되어야만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인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에서 사내 1위, 혹은 지역 내 1위가 되어야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는 1등을 못하면 실업자가 되어 다시 정치에 도전하거나, 아니면 직업을 바꾸어야 한다. 더구나 혼자만의 전쟁이 아니다. 다른 일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선거에 뛰어든 운동원들, 많은 희생을 치르거나 후원금을 보내준 지지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패할 수 없다.

      

그래서 정치가는 가장 고단한 영업자가 된다. 세상의 모든 영업자들은 주요 고객들을 만나 어떻게든 호감을 얻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이런 감정노동이 부담스러워서 사업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영업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일반 영업자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영업을 할 필요는 없다. 일정 규모의 고객을 확보하면 성공하고 큰 부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에게 2등은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무조건 1등을 하기 위해 불편한 사람들과 반대파를 가리지 않고 만나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설득해야 한다.

      

오바마는 선거 운동의 지난한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공식 업무 이후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회합과 만남들, 가족과의 마음 편한 식사 대신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식사 모임들, 차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순회공연하듯 장소를 이동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수없이 반복하는 빽빽한 일정….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오바마가 당원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후원금 기부를 독려하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부분이다. 오바마는 잘나가는 영업사원이 아니었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그가 고객들에게 전화를 걸 때 느꼈을 곤혹스러움, 거절당할 때마다 느꼈을 열패감에 깊이 교감한다.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업자형 정치가에 비해 신념을 추구하는 정치가는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 크다.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고 훨씬 더 가혹하게 평가받는데 정치 활동을 통해 얻는 개인적인 이득은 거의 없다. 정치를 안 했으면 사업이나 고소득 전문직 활동으로 돈을 많이 벌고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흑색선전에 시달리고 돈도 못 번다. 빚을 지지 않기만 해도 다행일 지경이다. 오바마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스트레스 때문인지 눈에 띄게 머리가 하얘지고 주름이 늘었다. 방송 뉴스에서 볼 때마다 왜 저런 고생을 사서 하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도 오바마는 퇴임 전후 인기가 높은, 개인적으로는 성공한 대통령이다. 지금도 잘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정치가로서 품었던 꿈도 이루어졌을까?     


분열된 미국을 통합하고자 했던 담대한 희망의 현주소     


오바마는 미래에 대한 공통된 비전으로 미국을 통합하려 했지만, 현실을 보면 미국의 양극화와 분열은 더 심해진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의 ‘담대한 희망’은 아직 실현되려면 멀었다. 직접 선거를 하지 않고 선거인단을 뽑아 주(州)별로 우세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미국의 특이한 선거제도 때문에 원래도 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큰 민주당 지지 주들과 공화당 지지 주들 사이의 갈등과 분열이 더욱 더 증폭되고 있는 것 같다. 트럼프가 민주당 지지 주인 캘리포니아 주의 산불을 끄는 데는 관심이 없고 정치 쟁점화하는 데만 골몰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을 잘 아는 사람들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해안가 대도시들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내륙 지역은 같은 국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고들 얘기한다.

      

나는 오바마의 책을 만들기 몇 년 전에 <트럼프의 부자 되는 법>과 <거래의 기술>도 편집했다. 그 후 트럼프는 부동산 사업가보다 방송 엔터테이너로 더 유명세를 얻게 되는데 <어프렌티스> 프로그램에서 견습생으로 고용된 사람들에게 카리스마 넘치는 포즈로 “You’re fired!”(너는 해고야)를 외치는 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 그런 모습이 멋있게 보일까? 당시 아마존에서는 ‘You’re fired!’가 새겨진 기념 티셔츠와 머그컵 등이 인기리에 팔려나갔다. 그것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비이성적 현상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트럼프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 ‘You’re fired!’를 패러디한 새로운 티셔츠를 만들어 입는다. 


     

2020년 선거에서 트럼프는 투표 결과에 순순히 승복하지 않을 태세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미국과 세계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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