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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인분공부 Aug 17. 2020

지식교양서 시리즈 – 출판은 지식과 교육의 근간

책을 재미로 읽을 수도 있지만 책이 다른 문화산업이나 다른 유형의 콘텐츠와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책이 지식을 습득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이고 교육의 직접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책은 그 어떤 매체보다도 공부, 학습과 가장 밀접하다. 도서 구입에 가장 많은 돈을 쓰는 독자들은 학습 욕구가 높은 사람들이다.

      

서양의 지식 문명이 독주하는 시대, 이른바 후진국들은 선진국의 지식과 문화를 수입하기에 바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국가가 나서서 서양 고전을 집중적으로 번역했고, 중국도 개방 과정에서 서양의 과학 양서들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습득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출판계에서 일하면서 우리나라에는 번역이 안 된 서양 고전도 많고 일본책을 번역한 중역본이나 번역 품질이 의심스러운 도서가 많다는 얘기를 끊임없이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전통과 맥이 끊어지다 보니 우리나라 고전들과 주변국의 고전들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책들이 많다고 들었다.


고전을 포함해 각 전공 분야 필독서들을 정확하게 번역한 책도 필요하고, 그것을 우리나라의 현 상황에 맞게 대중적으로 잘 해설한 도서들도 필요하다. 이런 동서양 고전들은 오래된 출판사들의 주된 수익원이 되어온 ‘스테디셀러’, ‘백리스트’였다. 특히 세계문학전집은 여러 출판사에서 총력을 기울인 핵심 상품군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고전이나 전공 필독서들은 극소수의 책들이 어쩌다 주목받을 뿐 어떤 출판사의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지 기준을 알기 어렵고, 책을 검색해 보면 국내에 번역본이 출간되지 않았거나 절판된 책들도 많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데카르트의 오류>는 감정과 느낌이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지 실증적으로 제시하여 뇌과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여러 학자들이 주요 저서에서 그의 연구와 책을 언급하고 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로 유명한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바른 마음>의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소셜 애니멀>의 데이비드 브룩스 등이 다마지오가 그들의 작업에 커다란 영감을 주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한때 <데카르트의 오류>는 절판 상태였다. 미국 아마존에서 찾아보니 웬만한 신간보다 판매순위가 높았다. 나는 아는 교수님께 문의했다. 철학과 뇌과학 전공자에게 필요한 책 같은데 재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쭤보니 그 교수님께서는 예전에는 출판사들에 그런 책들을 출간하도록 종종 권유했지만 워낙 판매가 신통치 않다 보니 이제는 권유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재출간을 추진할까 하다가 장기적으로는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더라도 단기 매출은 낮을 수밖에 없는 그런 책을 내자고 하면 혹시 승인이 되더라도 사내에서의 내 입지도 약화되고 책도 찬밥 신세가 될 것 같아 그냥 접었다. 한참 후에 확인해 보니 다행히 다른 출판사에서 그 책을 재출간했다.

     

동서양 지식의 계보를 그리다 


나는 철학, 과학, 사회학 등 각 분야를 총망라, 국내 학자들이 직접 집필하여 동서양 지식의 계보를 완성하는 원대한 기획의 지식교양 시리즈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시리즈의 기획자는 대중교양서를 여러 권 집필한 학자였고, 각 분야의 소장학자들로 필진을 구성했다. 내가 담당자로 지정된 것은 필진이 대부분 결정되고 원고가 하나씩 들어오던 시점이었다. 외주업체에서 책을 다 만들어 납품하니 관리만 하면 된다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그 시리즈 외에도 진행하는 책들이 많았다. 회사에서는 총 50종으로 기획된 그 시리즈를 수개월 내에 출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원고는 단 한 종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초고가 입고된 경우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 원고들은 언제 입고될지 알 수 없었다. 입고된 원고의 스타일이나 난이도도 저자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일부 저자는 대중서를 여럿 출간했지만, 다수의 저자들은 대중서를 집필한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는 그 책의 수준을 중학생에 맞추라고 했다. 상위 1% 중학생이 아닌 평범한 중학생이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대중적으로 쓰인 원고들조차 내가 읽기에도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의도한 것은 <노빈손>, <한국생활사박물관>,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학습교양서 시리즈였던 것 같다. 그러나 저자들의 의도, 원고의 수준과 내용으로 볼 때 그 시리즈는 중학생 대상의 학습교양물이 되기는 어려웠고, 대학생이나 일반 인문 독자 타겟이었다.

      

이처럼 회사의 의도와 실제 원고가 다른 것도 근본적인 문제였지만, 당장 코앞의 문제는 외주업체의 진행 능력이었다. 외주업체의 중간 결과물을 보거나 회의를 할 때마다 점점 더 심란해졌다. 그 업체는 그처럼 방대하고 난이도가 높은 작업을 할 역량이 없었다. 과거에 그런 일을 수행한 이력도 없었다. 업무에 대해 파악하면서 나는 그 외주업체를 떼어내야만 그 시리즈가 제대로 출간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익 추구와 실무에 대한 무지     


나는 경영자에게 그 시리즈를 수개월 내에 출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늦게라도 시리즈가 출간되려면 외주업체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당시 경영자가 회사의 자금을 횡령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그 외주업체가 경영자의 자금 세탁을 도와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의 돈세탁을 도와준 외주업체를 해고하라는 내 말이 경영자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나는 불가능한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생활이 불규칙해졌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고, 며칠씩 결근을 하기도 했다. 몸이 아파서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어깨가 항상 쑤셨는데, 그런 걸 ‘오십견’이라고 부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며칠 만에 오후 늦게 출근했는데, 경영자가 내게 다가왔다. 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예쁘다고 했다. 평소와는 딴판으로 친절하게 나를 격려하고 응원해 주었다. 직원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하던 경영자가 갑자기 친한 척을 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때 이 시리즈가 출간되고 나면 나를 해고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뇌과학에 따르면 우리는 의식에서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입수한다. 아마도 내가 의식할 수 없었던 방대한 정보를 통해 나는 내가 단기간의 목적을 위해 이용당하고 버려질 것임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경영자는 상당 부분 내 뜻대로 시리즈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나는 외주업체를 해고하고 회사 내에 전담팀을 꾸렸다. 내가 진행하던 책들도 모두 다른 편집자들에게 인수인계하고 시리즈 작업에만 매달렸다. 방대한 작업인 만큼 여전히 외주자들이 여럿 필요했으나, 업체에 통으로 맡기는 대신 내부에서 일일이 감독하며 모든 사항을 직접 조율했다.      


우여곡절 끝에 애초에 3월 50권으로 출간될 계획이던 시리즈는 12월에 1차분 15권이 출간되었다. 언론의 호평을 받았고, 사내에서도 많은 칭찬과 축하가 이어졌다. 경영자가 직접 불러 공로를 치하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예상했던 대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내가 해고당한 건 역린을 건드려서였을까? 아니면 그 회사에서 해고당한 수많은 다른 직원들처럼 별 이유 없는 경영자의 변덕 때문이었을까?      


그 회사에서는 입사한 지 하루 만에 혹은 며칠 만에 해고당하거나 스스로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아서 총무 직원이 신규 직원들의 건강보험을 일부러 늦게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전 직장에서 퇴사하고 바로 이직한 사람들에게 건강보험 지역가입자 전환 통지서가 날아오곤 했다. 몇 년씩 다닌 직원들도 하루아침에 뚜렷한 이유 없이 해고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당사자는 물론 주변 사람들도 해고 사유를 몰랐다.      


회사는 막대한 흑자를 올리고 있었으므로 직원을 해고할 경영상의 사유는 없었다. 난이도가 높은 시리즈를 론칭하여 대내외의 호평을 받았으므로 내게서 귀책 사유를 찾기도 어려울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떠나야 할 때였다. 그 경영자의 배임, 횡령에 대해 증거를 보지는 못했지만 정황과 소문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주주들이 경영자를 교체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경영자와 한통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부당해고를 받아들일 테니 석달치 급여를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돈이 넘쳐나던 회사에서는 그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 회사는 해고가 남발되는 만큼 해고 통보 후 인수인계도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나는 해고를 통보받은 지 3일 만에 4년간 재직한 회사의 업무를 정리하고 퇴사했다. 그리고 보름 후 다른 출판사로 이직했다.      

해고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해고되지 않았다면 나는 불가능한 일에 집착하며 심신이 망가졌을 것이다.      


나랏일이나 회사일이나 일이 어그러지는 내부적 원인은 비슷하다. 바로 사익 추구와 실무에 대한 무지이다. 이 두 가지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나는 애초에 잘못 짜인 판에서 제대로 일을 한답시고 무리수를 두었다. 난이도가 높은 시리즈 작업을 하면서 실무적으로는 큰 공부가 되었다. 그러나 아쉬움은 남는다.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경영자가 아니라, 출판사업에 대해 제대로 된 안목과 의지를 지닌 경영자와 함께 일했다면 결과가 더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나중에 경영자는 자신의 잘못을 일부 깨달은 것 같다. 억지로 중학생 타겟으로 하다 보니 쉬운 학습교양서처럼 보이도록 일러스트로 표지를 만들었는데, 퇴사 후 한참 지나고 나서 보니 표지가 모두 일반적인 인문교양서 스타일로 바뀌어 있었다. 경영자도 그 시리즈의 타겟이 중학생이 아니라 일반 인문 독자임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던 것 같다.      


자금력경영자의 의지와 실무자의 역량

     

오랜 기간과 비용을 투입해 만드는 지식교양 시리즈는 출판사의 장기적인 수익원이 되어주지만 추진하기가 쉽지 않다. 오랜 기간 매출이 발생하지 않는 대형 기획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력이 필수다. 경영자의 의지도 중요하다. 재정적으로 탄탄한 회사라도 경영진이 단기 매출 실적에만 연연한다면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시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재직했던 한 회사에서는 대형 시리즈를 기획하고 개발한 사람들이 회사에서 구박받다가 쫓겨나다시피 한 후, 영업팀만 오랫동안 그 결실로 높은 인사평가를 받기도 했다.      


나는 다시는 그런 대형 시리즈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많이 팔리는 책을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향성이 없는 회사에서 경쟁사들보다 높은 실적을 올리면서도 늘 단기 매출 실적에 쫓기며 살았다.      


독자의 호평을 받고 수십 년간 사랑받는 대형 기획 시리즈에 참여하는 편집자는 행운아다. 그런 작업에 참여할 만한 역량을 갖추기도 힘들지만,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그런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한다. 편집자의 역량만이 아니라 회사 전체의 역량이 중요하며, 출판업의 소명을 제대로 인식하고 사업적 재능도 갖춘 경영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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