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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인분공부 Jul 02. 2020

룬샷 – 꾸준한 성실함으로 베스트셀러를 잡다

베스트셀러는 특별한 계기로 잡게 되기보다는 매순간 열심히 자료를 검토하고 가능성을 타진하는 꾸준한 성실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책이 대박이 될지 미리 알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출판 저작권 수출입을 중개하는 에이전시들은 회원사들에 정기적인 레터 형태로 외국도서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책들은 별도의 메일로 소개한다. 런던 도서전, 볼로냐 도서전, 북엑스포아메리카(BookExpo America),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시기에는 도서 수출 홍보를 위한 외국 저작권사의 라이츠 가이드(Rights Guide)를 회원사들에 발송하거나 자사 홈페이지에 목록으로 게시한다. 이 라이츠 가이드들은 영미권과 유럽의 출판사들이 망라된 만큼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대형 출판사에서는 외서 기획자가 라이츠 가이드를 검토하지만, 외서 기획자가 없는 출판사가 더 많고 외서 기획자가 따로 있더라도 책을 직접 편집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편집자의 안목과 의지가 외서 계약과 성공적인 출간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편집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외서 기획에 참여하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런던 도서전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여러 번 참석했는데, 출장 전후나 비행기에서, 외국 에이전트와의 미팅 사이사이에 방대한 라이츠 가이드들을 읽고 또 읽었다. 도서전 출장 때마다 꽉 짜인 미팅 스케줄과 라이츠가이드 검토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휴식을 취할 새가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 매일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씩 회사 이메일로 업무를 체크했다.     


<룬샷>을 계약할 당시 나는 육아기 근무시간 단축제도를 활용하고 있어서 하루에 4시간만 근무했다. 4시간 근무로는 편집 주간으로서 기본적인 행정 업무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오랫동안 숙련되어 업무 속도가 빨랐지만 잠시도 쉴 틈이 없었고, 외서 검토는 단축 근무를 하기 전에도 업무시간에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오랜 기간 무수히 많은 타이틀들을 검토한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성 높은 아이템들만 신속하게 가려내어 상세 검토를 진행했다. 도서전 시즌에는 에이전시들과 미팅을 잡아 주요 타이틀들을 소개받았다.      


<룬샷>은 담당 저작권 에이전시에서도 주력 도서로 소개한 타이틀이어서 눈여겨 보았다. 바이오테크 기업을 설립해 성공시킨 천재 물리학자가 물리학 이론을 응용해서 혁신의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다룬 책이었다. 주목받는 영미권 경제경영서는 A4 10페이지 정도의 간단한 소개서(프로포절)만 있는 형태로 검토하고 계약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 책은 검토 당시 현지 출간 전이었으나 원고는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원고를 검토하며 학술적 권위도 있고 비즈니스 경험도 풍부한 저자에, 독창적이고 영감에 넘치며 시의적절한 내용에 감탄했다. 에이전시 미팅에 함께 참석한 편집자 역시 아주 긍정적인 의견이었다.      


이 책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타겟은 수익을 내지만 한계가 뻔한 기존 사업과 미래가 불투명한 신사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기업들이다. 회사의 매출을 이끄는 부서와 돈만 까먹는 신사업 부서의 대립이 얼마나 극심한지 웬만한 회사원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영진은 반드시 효율성과 창의성, 안정과 혁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      


그러나 경영 혁신을 다룬 책은 그동안 판매가 크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최대 판매 사이즈가 수만 부를 넘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역시나 사내에서 논의할 때 반대에 부딪혔다. 아마도 선인세가 아주 높았다면 계약하자고 주장하기 어려웠겠지만, 다행히도 책의 가치에 비해 선인세 수준이 그렇게 올라가지 않았다. 다른 출판사들 역시 경영 혁신을 다룬 책이라는 점 때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사내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개인이나 인문서 독자, 사회 전체에도 효율성과 창의성, 안정과 혁신의 균형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 풍부한 함의를 주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반적인 경영서에 비해 확장성이 있었다. 그래서 독자가 제한되고 내용이 어렵다는 이유로 이 책의 계약에 반대하는 측에게 이 책은 인문서 독자들도 매우 좋아할 만한, 시장성 면에서 일반 경영서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높은 책임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런 책은 몇 년에 한 번 나오기 어려운 역작인 만큼 손해를 보지만 않는다면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국내 번역판권 계약 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화제작이 되었다. 그렇게 현지에서 검증된 후 국내에서도 재테크서가 장악한 경제경영서 시장에서 경영 이론서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외서 기획 담당자라면 주요 타이틀을 놓치지 않고 검토해야겠지만, 실무 부담이 큰 편집자나 편집장은 여유가 있을 때만 외서 검토에 시간을 할애하고 바쁠 때는 그냥 패스하기 쉽다. 그러나 중요한 타이틀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아무리 바빠도 가능성 높은 타이틀들을 챙겨서 검토하다 보면 남들이 놓친 기회를 잡게 된다.      

롤스의 정의론을 계승한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런 내용을 다룬 책으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100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그 책을 계약할 당시 그 출판사의 외서 기획 담당자는 출판계에서도 성실하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다른 일을 하다가 출중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뒤늦게 출판계에 입문한 그 분은 해외 도서전 출장을 다닐 때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니며 수많은 저작권사들의 라이츠 가이드를 샅샅이 검토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분의 얘기에 따르면 <정의란 무엇인가>를 계약할 당시 이미 그 유명한 하버드 강연 동영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동영상과 도서 자료를 당시 인문팀장에게 전달했고, 함께 검토한 결과 오퍼했다고 한다. 선인세도 별로 높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동영상을 시청했다면 누구나 마음이 동했을 것 같다. 아마도 다른 출판사들은 정치철학 분야의 책이 기존에 많이 팔린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관심을 접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대형 베스트셀러를 잡을 수 있었던 동력은 결국 매일매일의 성실함이다. 그리고 성실함이란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아니라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아이템의 가능성을 온전히 파악하려는 성의 있는 자세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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