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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인분공부 Jul 03. 2020

이야기의 탄생 – 매력적인 콘텐츠의 가치

국내서나 외서 기획을 할 때 주요 도서는 처음부터 회사 차원에서 검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유명 저자의 저서, 외서 대형 타이틀은 특정인이 기획했다고 얘기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고 누가 의사결정에 깊은 영향력을 발휘했나가 관건이 된다. 최종 의사결정은 당연히 경영자가 내리지만, 그 과정에서 해당 타이틀의 가능성을 깊이 있게 검토해 올바른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는 근거를 제시하는 중간관리자, 편집자, 또는 마케터의 역할도 중요하다.      


반면에 사내에서 아무도 관심이 없는 타이틀을 기획자가 발굴하여 검토한 후 사내 인사들을 설득하여 계약에 성공했다면 그 타이틀은 해당 기획자의 독자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탄생 THE SCIENCE OF STORYTELLING >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문학 분야의 인지도와 도서 라인이 거의 없는 회사에서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고 잘 아는 분야의 도서라 검토한 후 독자층을 확장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여 이 타이틀을 계약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회사 차원에서 관심이 거의 없는 분야라 선인세가 높았다면 아마도 논의조차 이루어지기 어려웠겠지만, 다행히도 원고의 가치에 비해 선인세 수준이 별로 높지 않았다.      


나는 대학시절 내내 소설 창작을 했고 대학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신춘문예에 응모한 적이 있다. IMF 경제위기 이후에는 먹고사는 데 치여 아예 등단할 시도조차 포기했지만, 단행본 출판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도 주로 소설과 인문서만 읽었다. 문학보다는 다른 분야에 더 주력하는 출판사나 편집팀에서 일하며 직업상 필요한 책들 위주로 독서를 하다 보니 문학보다 다른 분야 책들을 훨씬 더 많이 읽게 되었지만 <THE SCIENCE OF STORYTELLING>이라는 원제를 보고 검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뇌과학의 원리’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스토리텔링의 원칙을 탐구했다니 한 마디로 ‘죽이는 콘셉트’였다. 그동안 뇌과학 기반의 과학서, 경제경영서, 인문서, 자기계발서들을 출간하면서 뇌과학이 각 분야에 얼마나 거대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지 목도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는 해외에서 전작이 훨씬 더 유명했다. 전작이 영미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십만 부 이상 팔렸고 주요 타이틀로 국내에 소개되어 아마도 많은 출판사에서 관심 있게 검토했을 것 같다. 그러나 SNS의 폐해를 다룬 그 책은 내가 판단하기에는 국내에서는 이미 상식적인 얘기라 반려하기로 결정했다. 영미권에서 큰 화제가 된 책이라 국내 다른 출판사가 수입했을 법도 한데, 2017년에 현지 출간된 그 책은 국내에는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계약이 안 된 건지, 너무 두꺼워서 번역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THE SCIENCE OF STORYTELLING>을 저작권 에이전시가 소개했을 때, 다른 출판사들은 저자의 전작에 실망하여 자세히 검토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전작은 사회학 관련 도서였는데, 이 책은 스토리텔링, 그것도 정통 서사 구조를 다룬 책이라 저자가 정말 전문성이 있나 의심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 약력을 꼼꼼히 검토하자 오히려 신뢰감이 더해졌다. 전작을 검토할 때는 저자가 기자라는 점만 부각되었다. 어쩌면 다른 경력도 소개 자료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사회학과 관련된 내용이라 머릿속에는 저자가 기자라는 기억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도서 검토 자료에서 저자 약력을 읽어보니 저자는 기자 겸 소설가였고, 런던에서 저널리즘과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었다. 즉,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작가였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사로잡는 스토리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현실이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정보의 조각들을 어떤 플롯으로 연결해서 전달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기사 역시 어떤 의도로 어떻게 정보들을 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를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책은 뇌과학에 기반한 책이었다. 저자가 뇌과학자는 아니지만, 최신 뇌과학의 연구 성과에 기반한다면 책의 독창성과 퀄리티를 신뢰할 수 있었다. 저자의 ‘스토리텔링의 과학’ TED 강연을 보니 확신은 더욱 더 강해졌다.     


그렇지만 독자 타겟이 기존의 창작자에게만 국한되었다면 계약하자고 주장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전통적인 글쓰기 책의 판매 사이즈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계약할 때에도 타겟 독자가 뚜렷하니 많이 팔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내 판단은 달랐다. 우선 여러 콘텐츠 플랫폼의 성장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창작에 뛰어들었다. 기업 광고조차 요즘에는 스토리 광고 형태가 대세가 되었다. 창작자와 문화기획자 자체가 많이 늘어난 데다 기획, 홍보 업무를 하는 사람들조차 어떻게 하면 설득력 있는 스토리를 만들까 고민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야기에 매혹되는 인간의 본성을 뇌과학적으로 규명한 내용은 직접 창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보편적인 인문교양서 독자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나는 매력적인 내러티브 콘텐츠의 조건을 인간의 뇌의 작용과 관련해서 제시하는 이런 책은 수요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으므로 반드시 계약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당시 원서를 검토하며 <SKY 캐슬>과 <왕좌의 게임>에 적용해 보았는데 대체로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결함 있는 인간적인 주인공, 정보의 공백을 채우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욕구,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줄거리, 인물의 결함과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질문, 그 결함과 변화가 촉발하는 ‘예기치 않은 행동’ 등 흥행하는 소설과 영화, 드라마의 공통점을 잘 추출해냈다는 느낌이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범용화되었고, 결국 비즈니스의 핵심은 대중의 시간과 관심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가 되었다. 자동차 회사는 스스로를 플랫폼 회사라 선언하고 모든 플랫폼의 최종 목적은 쇼핑과 콘텐츠 구독이다. 기존의 문화산업만이 아니라 IT기업, 제조업도 콘텐츠 플랫폼 기업으로 거듭나는 세상에서 매력적인 콘텐츠를 창조하고 기획하는 능력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가뜩이나 성장세이던 넷플릭스가 우리나라 콘텐츠 시장도 장악하게 되었다. 넷플릭스는 많은 창작자들에게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할 기회를 준다. 봉준호 감독이나 김은희 작가 같은 최고의 작가들이 넷플릭스 플랫폼을 타고 전 세계와 직접 연결되었다.      


다음 웹툰이나 카카오페이지, 문피아는 유명 저자를 활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신인이 대형 작가로 발돋움하는 플랫폼이기도 했다. 출판 쪽은 워낙 돈이 안 되는 분야였기에 그동안 IT 플랫폼의 진격이 지체되어왔다. 그러나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콘텐츠가 축적되어 있으므로 어떻게든 그 콘텐츠를 활용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전개되고 있다.     


출판의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콘텐츠의 미래는 아주 밝다. 매력적인 한류 콘텐츠가 전 세계로 뻗어가길, 대형 흥행작만이 아니라 소수의 취향을 반영하는 다양한 작품들도 무수히 쏟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도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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