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_3회
백수 원년차, 버킷리스트를 쓰다
백수가 되면 시간이 많을 거라고들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은 많다. 다만 방향이 없다.
출근하지 않는 하루는 길고, 그 하루들이 이어진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빨리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버킷리스트를 쓰기로 했다.
대단한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목록에는 성공 계획도, 인생 반전의 비책도 없다.
대신 잘 자고, 몸을 움직이고, 기록하고, 최소한의 수입을 다시 만들어보겠다는 다짐이 있다.
백수 원년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꿈이 아니라 리듬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운동 항목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탁구, 자전거, 황톳길, 요가.
탁구를 넣은 것은 직접 대면하며 사람들과 꾸준히 어울리기 위해서다.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같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이건 취미가 아니라 생존 기술에 가깝다.
숲을 걷고, 책을 읽고, 기록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목본연구회와 겨울숲바라보기, 독서 모임과 글쓰기는
나를 특별하게 만들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나를 나로 붙잡아 두는 장치다.
참여만으로는 부족해서, 이제는 반드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결과가 있어야 하루가 정리되기 때문이다.
여행도 넣었다.
다만 욕심은 줄였다.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조건이 충족될 때만 허락되는 경험으로.
이 목록의 중심은 사실 하나다.
다시 일을 하는 것.
‘제2의 직장 구하기’라는 문장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안에는 방향 설정, 수입 발생, 지속성이라는 세 단계가 들어 있다.
이걸 외면한 채 잘 사는 척하는 건, 나에게 가장 위험한 선택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과의 관계다.
안부 전화, 편지, 글.
백수가 가장 쉽게 잃는 것은 직함이 아니라 관계의 접점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말을 걸어 두려고 한다.
응답이 없어도 괜찮다. 연결을 끊지 않는 것이 목적이다.
이 버킷리스트는 소망 목록이 아니다.
연말에 체크 표시를 하려고 만든 것도 아니다.
이건 백수 원년차를 무사히 통과하기 위한 생활 설계도다.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이 목록 중 하나를 한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