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에서, 백두대간의 기를 읽다

선자령_11회

by 광풍제월

선자령에서, 백두대간의 기를 읽다

2026.1.25. 일 (D-340)


아침 6시 55분, 옆방 동기와 약속한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향했다. 문을 나서자마자 공기의 결이 달랐다. 강원도의 공기는 차갑지만 가볍고, 숨을 들이킬수록 폐 속이 씻기는 느낌을 준다. 이 공기라면 돈을 내고서라도 마시겠다는 말이 농담처럼 오갔고, 하루의 시작은 그만큼 산뜻했다.


8시 정각, 선자령으로 출발했다. 대관령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길에 올랐다. 재작년에 비해 눈은 많지 않았고, 예보와 달리 바람이 잠잠해 체감 온도는 견딜 만했다. 오늘의 탐방 코스는 대관령휴게소를 기점으로 양떼목장–풍해조림지–샘터–전망대–국사성황사를 거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약 12km. 예정 시간은 7시간이다.


몸을 풀고 조별로 나뉘어 출발했다. 오늘 해설은 손종례 강사님이 맡았다. 선자령은 바람의 산이다. 강사님은 이곳에서 나무를 읽는 기본 언어들을 짚어 주셨다.
깃발형 수형, 풍향수, 강대, 최음수 같은 용어들이었다.
깃발형 수형은 줄기는 곧게 자라지만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는 가지가 자라지 못하고 반대 방향으로만 가지가 자라는 현상이다. 풍향수는 줄기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고, 강대는 바람과 기상 스트레스로 수분 이동이 차단되어 선 채로 고사한 나무다. 최음수는 햇빛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줄기 밑부분까지 가지를 옆으로 넓게 펼친다. 선자령의 나무들은 제 몸으로 이 산의 기후를 기록하고 있었다.


깊은 계곡을 오르다 강사님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계곡 아래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라는 신호였다. 얼음 속을 흐르는 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는 분명했다. 미세하게, 그러나 쉼 없이 흘렀다. 겨울이 가장 깊은 자리에서도 물은 멈추지 않는다. 그 소리는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미리 들려주는 신호 같았다. 겨울 숲에서 듣는 물소리는 늘 그렇듯, 계절의 전환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100년이 훌쩍 넘은 들메나무 앞에서 강사님은 함민복 시인의 「나이에 대하여」를 낭독해 주셨다. 원래는 300년 된 느티나무에 관한 시였지만, 이 들메나무에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을 쌓아 올리지만,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이전의 나이를 지운 채 현재의 몸으로만 산다.


300년을 산 나무라면, 밑동은 300살이고 우듬지는 한 살이다. 나무는 자기 생의 모든 시간을 몸에 남긴다. 겨울눈을 기준으로 해마다 새로운 시간을 덧붙이며 살아간다. 나무에 새겨진 오래된 이름을 보면 위로 더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만 퍼진 흔적들 역시, 나무가 시간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이다.


바람이 없으니 선자령 정상까지의 길은 수월했다. 그러나 정상부의 풍경은 달랐다. 이곳의 나무들은 키 크는 일을 일찌감치 포기한 듯했다. 지속적인 강풍은 수직 성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나무들은 낮고 단단해졌다. 우리가 올라오며 보았던 강대와 달리, 정상부에는 또 다른 형태의 풍향수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산의 정상은 늘 가장 가혹한 조건을 먼저 보여준다.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남겼다. 2년 전 이곳에 왔을 때는 바람이 너무 거세 끝내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맑은 하늘 아래 선자령에 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람은 없었지만, 대신 사방으로 열린 능선과 하늘이 우리를 맞이했다. 나쁜 기운은 멀리 돌아가는 풍력발전기의 날개에 실어 보내고, 발끝으로는 백두대간의 기운이 천천히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선자령에서 우리는 작은 졸업식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이제 수료까지 두 번의 답사만이 남아 있다. 바람이 잠든 선자령은 조용했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축하처럼 느껴졌다. 산은 말없이 기를 주고 있었다.


하산길에서도 해설은 멈추지 않았다. 노린재나무는 위치에 따라 수형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신갈나무는 왜 정상부에서 키 성장을 멈추는지를 하나하나 짚어 주셨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 온 신갈나무들이 유난히 대견해 보였다. 조건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맞게 자기 몸을 바꾸며 살아온 존재들이다.

선자령 답사를 마치고 나니, 올 겨울숲바라보기의 가장 큰 과제를 하나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숲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우리는 조금 더 읽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선자령은 오늘도 말없이 서서, 바람과 시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1769574285984.jpg 선자령 정상(202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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