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의 반란

<3부> 그럼에도 낭만을 사랑하는 이유

by 깜지

기적은 언제나 언더독의 손을 들어준다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낭만을 깨우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언더독의 반란'일 것이다. 그도 그럴게 주인공이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를 거머쥐는 클리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학 기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왜 인류가 이런 승리에 도취되어 열광하는지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종종 이야기하는 '낭만 DNA' 설만이 그 근거를 뒷받침해 줄 뿐이다. 인류의 역사가 깊어질수록 수 없이 많은 언더독의 스토리가 탄생했다. 역사를 넘어 현재는 장르의 경계를 초월하여 수많은 분야에서 그 사례를 엿볼 수 있다. 스포츠, 음악, 엔터테인먼트, 예술 등 인류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문화적 가치 안에서 언더독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언제나 뜨거운 눈물과 잔잔한 울림, 그리고 환희를 선물하고 있다.



낭만파들은 각자만의 언더독의 반란 스토리를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낭만을 깨우치는 여러 과정 중 언더독의 반란이 포함되어 있다. 나에게 울림을 주었던, 동시에 나에게 용기를 주었던 평생 잊지 못할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바로 '공은 둥글다'라는 명언으로 대표되는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서 말이다.



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런던 연고지 팀인 '첼시'의 광팬이다. 한국 공식 서포터스로서 당당히 활약도 하고 있다. 사실 이 팀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리그를 재패한 '탑독'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언더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 팀이 언제나 상위권을 유지하며 무적과도 같은 팀은 아니었다. 언제나 기복이 있었고 오르락내리락 반복을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이 첼시라는 팀을 나의 가슴에 영원히 담았던 시즌은 아이러니하게도 내리막길을 걷는 시점이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전설적인 선수들이 노쇠화를 겪으며 기량이 점점 저하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리그에서는 날이 갈수록 무기력하게 패배하는 날이 늘어만 갔다. 이런 날이 늘어만 갈수록 세상에 영원한 탑독은 없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도 어렴풋이 깨닫게 될 수 있었다.



한 시즌 농사를 망친 첼시에게도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리그와 함께 병행하고 있었던 유럽 최고 권위의 대회인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가까스로 16강까지는 진출한 점만일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16강 나폴리와의 원정 1차전에서 3:1 패배를 당하며 탈락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나는 첼시의 실망스러운 행보에 지쳐 희망을 내려놓고 있었다. 설상가상 홈 2차전을 앞두고 기존 감독이 경질되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클럽의 결정에 그만 신물이 나 응원하기마저 꺼려했었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임시 감독은 결국 예정대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는 클럽 역사상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 결정이 바로 신의 한 수가 된 셈이었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무엇인지를 절실히 보여주는 선택이었다.



임시 감독이었던 디 마테오 감독은 팀을 빠르게 재정립했고 노장들을 중심으로 동기부여를 자극하여 패배주의가 만연했던 라커룸 분위기를 단숨에 뒤집어버렸다. 그 결과 나폴리와의 홈 2차전은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연장전 역전 골을 넣으며 가까스로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드라마의 시작이었다. 이 경기를 보고 나서부터 조금씩 희망이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단순히 막연하게 앞으로도 계속 이길 거란 희망이 아니었다. 지고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 때문에 이 팀이 앞으로도 나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이었다.




8강에서 벤피카를 꺾고 4강까지 진출하였는데 4강에서 맞붙게 된 팀은 당시 유럽을 재패하고 최고의 선수인 메시가 버티고 있던 최강의 팀 바르셀로나였다. 모두가 바르셀로나의 승리를 예측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첼시는 진짜로 언더독이 되었다. 언더독이 되는 것은 참으로 비참했다. 축구를 함께 즐겨보던 많은 친구들은 내게 절망적인 말들만 건넬 뿐이었다. 하물며 전쟁터에 나가있는 선수들은 얼마나 더 힘든 싸움을 하고 있을까. 언론에서는 연일 첼시의 패배를 예측하는 보도기사만을 내보내고 있었다. 나 역시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절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4강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싸움이었다고 스스로 만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마음은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기적은 언제나 언더독의 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선수들 본인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흐름은 절대 무시 못한다는 것을. 비교적 쉽게 4강에 올라온 바르셀로나와 다르게 연일 혈투를 펼치며 힘들게 올라온 첼시의 기세는 상당히 강렬했으며 누그러트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경기는 예측대로 점유율을 압도당하며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첼시는 투지를 불태우며 몸을 아끼지 않는 일명 걸레수비를 보여줌으로써 골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결과 1차전에서 한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습 한 방으로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골로 연결하면서 1차전은 1:0으로 이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홈 어드벤티지를 가질 수 있는, 바르셀로나 홈에서 열릴 2차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비관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캄프 누로 가게 되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홈에서의 바르셀로나는 너무나 강력했다. 강력한 화력으로 전반에만 2골을 넣으며 첼시는 순식간에 리드를 잃게 되었다. 다행히 전반 끝나기 전 만회골을 넣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치 신이 첼시의 승리를 점찍어 준 듯 바르셀로나에게 불운이 계속 따랐다. 골대에 맞는 불운이 연속해서 이어졌으며 첼시 골키퍼 체흐의 미친듯한 연속적인 선방으로 추가 실점을 만들지 않았다. 설상가상 메시의 페널티킥 실축을 막아내며 기세는 완전히 넘어오게 되었다. 결국 후반 추가시간 동점골을 넣으며 합산 3:2 스코어 1승 1 무로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는 말처럼 승리의 미소는 첼시를 향해 짓고 있었으며 기적이 첼시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 순간 모두가 열광했다. 언더독의 반란이었다.



결승전 상대는 현재 김민재 선수가 뛰고 있는 팀으로도 유명한 독일의 강호 바이에른 뮌헨이었다. 뮌헨은 예나 지금이나 강팀이었고 당시에도 유럽 최강의 팀이었다. 게다가 결승전 장소는 뮌헨의 홈구장이었다. 원래 결승전 장소는 사전에 정해지는데 마침 뮌헨이 결승까지 올라오게 된 바람에 홈 이점을 얻고서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첼시는 단판 전 원정이라는 최악의 조건을 앉고 결승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설상가상 전 경기의 여파로 인해 경고누적, 레드카드 퇴장 징계로 주전 중 4명이 결장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야 했다. 여전히 그들은 언더독이었다.



역시나 너무나 뮌헨은 막강한 팀이었고 바르셀로나 보다 더 거칠고 단단한 팀이었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공격을 하면서도 절대 역습을 허용하지 않으며 첼시를 가두었다. 결국 1:0의 리드를 지키며 경기가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뮌헨의 우승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영웅은 결국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라 해야 할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클리셰는 어김없이 현실에서도 방영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이자 첼시의 주전 스트라이커이고 전쟁을 멈춘 사나이인 디디에 드로그바가 후반 추가시간 종료 직전 코너킥을 통한 극점 동점 헤딩골을 넣으며 게임의 행보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역시나 낭만의 신은 그들을 버리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결국 연장시간을 지나 승부차기의 순간까지 찾아왔었다. 골키퍼 체흐는 신들린 선방으로 승부차기를 막아내었고 마지막 키커로 나선 드로그바의 골로 인해 드디어 그토록 갈망했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의 성과가 단순히 기적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피와 땀을 흘릴 대가는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노력도 결국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의지에서 나온다. 그럼 그 의지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희망 가득한 낭만이다. 낭만파들은 역경이 찾아올 때 절망하기보다는 과정을 즐기려 한다. 그래서 즐기는 자는 자연스레 희망을 꿈꾼다. 애초에 희망을 엿보았기에 과정도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서사를 통해 나는 첼시라는 팀으로부터 낭만과 희망이란 선물을 받게 되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는 매번 이때의 기억을 상기하며 힘든 수험생활도 잘 버틸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성인이 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때의 경험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경험이자 내 영혼의 일부가 되었다. '공은 둥글다'라는 축구계의 명언처럼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으며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음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인생이 그런 시스템으로 설계되어 있다면 언더독의 반란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좋은 게 좋은 것만이 아닌 것처럼 싫은 게 싫은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단 사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 그렇다 보면 가끔 시련이 찾아와도 아주 일말의 희망을 곁들여 볼 수 있으니까. 언더독이란 건 그런 마음으로 사는 이들일 것이다.



삶에 희망이 있길 바란다면,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면 높은 자리에 가려고 애쓰려 보기보다는 낭만 가득한 낮은 자리에 있어보길 바란다. 기적은 언제나 탑독이 아닌 언더독의 손을 들어주기 때문이니까.



여담으로 이후에 첼시는 약 10년 뒤에 비슷한 과정으로 한번 더 챔피언스 리그에 우승하게 된다. 과정이 얼마나 비슷했냐면 중간에 감독이 경질되고 임시 감독이 선임된 상황과 리그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등 마치 평행이론처럼 너무나 소름 돋게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게다가 스쿼드의 질은 당시 전설적인 선수들이 있던 과거보다 더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강팀들을 모두 꺾고 모두의 예상을 뒤집은 채 우승하게 되었다. 나는 그 순간 다시 한번 낭만 가득한 환희에 차올라 기절할 뻔(?) 했다. 역시나 뻔하지만 나는 이런 클리셰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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