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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Apr 08. 2022

나도 언젠가는 틀니를 딱딱거릴 나이가 되겠지

절대 저런 어른으로 늙지 않을 거라던 다짐

아직도 외할아버지의 환갑 잔칫날 장면이 어슴푸레 기억난다. 생크림케이크에 꽂힌 초 대여섯 개를 끄는 걸로도 충분했던 내 생일날 풍경과는 어린 눈에도 완전히 달라 보였다. 한복이나 정장을 차려 입은 일가친척들은 끝도 없이 몰려와 외할아버지의 환갑을 축하했고, 음식들은 올려둘 자리가 없을 정도로 그득그득 차려져 나왔다. 아, 나이를 많이 먹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구나. 그 날 외할아버지는 나를 둘러싼 온 세계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돌이켜 보면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시절이었다. 일상 곳곳에는 장유유서의 정신이 건재했고, 특히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빛을 발했다. 엄마는 언니와 내가 제법 클 때까지 버스에서 각각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지 못하게 하셨는데, 어린 우리가 두 자리나 차지하고 앉으면 나이 드신 분들이 앉으실 자리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별 수 없이 언니와 자리 하나에 함께 엉덩이를 꼭 붙이고 앉을 때마다 속으로 얼마나 투덜거렸던지. 얼른 한 자리를 혼자 차지할 수 있을 만큼 덩치가 큰 어른이 되었으면 했다.


물론 덩치가 더 커졌다고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노약자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 머릿속에서 노약자석이란 마치 주차장의 장애인 구역처럼 애초에 앉아서는 안 될 자리였다. 하지만 파란 커버가 씌워진 일반석에 앉아 있을 때도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일어나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 드려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건 사회의 암묵적인 규칙이었고, 나도 대체로는 그 규칙을 미덕으로 여기며 자리를 비켜 드렸다.


고마워, 학생.


그 한 마디면 그래도 충분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양보의 의미가 뭔지도 모른 채 자리를 내줄 때와는 분명 달랐다. 조금은 내 자신이 뿌듯했고 마음이 편안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아름다운 자발적 양보의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놈의 학생이 어른이 탔는데 자리도 비킬 줄 모르고! 집에서 그렇게 배웠냐!


어린놈의 학생도 힘들 때가 있다. 종종 책가방이 유난히 무겁거나 탈진하도록 단체기합을 받고 온 날은 나도 도저히 자리를 비킬 기운이 안 났다. 혹은 친구와 떠들거나 창밖을 멍하니 보느라 미처 양보할 타이밍을 놓지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머리 위로 험한 소리가 내리 꽂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정도였냐고. 외할아버지의 환갑 잔칫날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생생하게 기억하는 하루가 있다. 밀레니엄버그로 떠들썩하게 200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날 언니가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새빨개지고 목이 꺽꺽 잠길 정도가 되어 들어왔다. 엄마와 내 얼굴을 보자 언니는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버스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언니에게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고 욕을 했는데, 그것도 한 두 마디하고 끝이 아니라 언니가 자리를 비키고서도 야단치기를 멈추지 않아서 다른 자리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말릴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언니는 결국 울면서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집까지  길을 걸어 와야 했다.


엄마아, 일부러 안 비킨 게 아니라, 흑, 못 봐서 그런 건데. 내가 얘기해도 할아버지가 자꾸 막 말대꾸한다고...


아, 그놈의 말대꾸. 장유유서의 세계에서 어른에게 말대꾸하면 안 된다는 무적의 논리는 어찌나 자주 파렴치해지는지. 그 날은 엄마도 그 파렴치함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괜찮아. 그런 일 또 있으면 말대꾸 더 해도 돼.


하지만 그 이후에 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해도 언니가 감히 말대꾸를 할 수 있었을까. 지금 같았으면 누군가의 휴대폰에 찍혀 인터넷에 오르내렸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때는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고 함부로 대들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냥 어리다는 건 종종 서러울 수밖에 없는 것임을 깨달으며, 나는 절대 저런 어른으로 늙지 않으리라 다짐할 뿐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상은 나의 그 깨달음과 다짐보다 더 빠르게 변했고, 언제나 중년일 것 같던 엄마와 아빠는 어느새 환갑을 넘겼다. 엄마 아빠의 환갑은 외할아버지의 환갑과는 달랐다. 온 친척들을 불러 거나하게 잔치를 치르는 일은 이미 구식 문화가 되었고, 평소보다 조금 더 두둑하게 준비한 용돈과 셀프로 어설프게 꾸민 풍선 장식이 이 날이 특별한 날임을 알려 주었다.


바뀐 건 환갑 문화뿐만이 아니다. 그사이 노인은 공경의 대상에서 보호의 대상으로 변했고, 때로는 혐오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세대 갈등이 악화된 데에는 자발적 공경을 이끌어내기보다는 강요하려 들었던 지난 시대의 후유증이 크고 생각한다. 비교적 최근인 2015년에도 지하철에서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고 노인이 젊은이를 때리는 사건이 있었을 정도이니 지나간 질서가 변화하는 시대와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하지만 갈등을 넘어 ‘틀딱’이니 ‘틀딱충’이니 하는 말들까지 유행하는 걸 보면... 누구보다 귄위적인 장유유서 문화를 경멸했던 나는 통쾌한 게 아니라 슬프고 두렵다. 누가 꼭 우리 엄마 아빠를 그렇게 부를 것만 같아서.


그리고 그런 생각 끝에는 이상하게도 언니가 펑펑 울면서 들어온 그 날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세상은 너무 폭력적이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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