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8.木 일자 [나를 팝니다] 63. < > 의 퇴고본을 공유합니다.
< >
추워질 즈음이면 나는 인생을 여러 번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맘때의 기억이 다 떠오르거든. 수년 전, 10년 전, 아주 어릴 때의기억까지도 마치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뭉텅이로 쏟아져 내려. 나는 그 엉켜버린 실타래를 애써 풀어내려 하지 않아. 손으로 가볍게 쥐어서, 부드럽고 폭신한 기억을 만져봐.
눈이 잘 내리지 않는 아랫지방에도 이례적으로 눈이 내렸지. 엄마 손을 잡고 한 겹 살얼음이 깔린 도로를 걷다 한 빵집에서 멈춰섰어. 마치 버섯처럼 생긴 케익이 있었거든. 저것 좀 봐요 엄마, 어찌 케익 모양이 저래요, 하며 한동안 멈춰 서있자, 엄마는 먹고 싶냐고 묻고는 순순히 빵집 안으로 들어가 케익을 사다 주었지. 평소에는 쉽게 먹어볼 수 없었던 조그맣고 비싼 케익을 선뜻 사다 준것은, 연말이니까 기분 내보자며 너그러워진 마음도 한몫했을 거야. 그 때 알았지. 추위는 쌀쌀해도 마음은 노곤해질 수 있는 계절이라는 것을. 그날 나는 한껏 웅크린 몸으로 추위와 맞바꿔 버섯 모양 케이크를 눈에 가득 담았고, 빵집 안에 들어서선 고소한빵 냄새와 따뜻한 공기에 둘러싸였어. 그러니까 그날의 겨울은 내게 고소하고, 포근했어.
부산 사는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오겠다고 마음먹은 날, 서울에 상경해 일주일간 이모 집에 신세를 졌지. 티브이로만 보던 컵케이크 집을 꼭 가겠다고 추운 날씨에도 길을 나섰어. 이모가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오라고 카드를 손에 쥐여줘서, 컵케이크뿐만 아니라 고소한 커리도 먹고, 차도 마셨어. 티비로 바라만 보던 맛집에서 돈 걱정 없이 먹고 나온 그날은, 심장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어. 나 꼭 이렇게 살겠노라고. 미래에 대한 터질듯한 기대와 영원히 지속될 거 같은 초라한 현실 그 중턱에 걸려있던 나는, 끝이온다는 사실에 조금은 울 것 같은 마음이 되어 머리맡을 올려다보았어. 촉촉해진 눈가에 비친 가로등 불빛은 번져서 더 동그랗게, 크게 반짝였어. 더운 마음을 식히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어. 그때 알았지. 추위는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밤이 늦어질 때까지 빛나는 간판과 가로등 사이를 누볐어. 그러니까 그날의 겨울은 내게 영롱하고, 반짝거렸어.
이처럼 기억이 경계 없이 흘러나올 때, 나는 세월이 흘렀다는 걸 느낌과 동시에 시간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고도 느껴. 어쩌면나는—이 매 순간을 살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과거를 돌아보는 노인의 심정이란 이런 걸까. 어쩌면 추위라는 건, 한 해를 반추할 기회가 때에 맞게 주어진 것 아닐까. 서늘하고차가운 공기에 맞닿은 생각은 선명하고 또렷해지거든. 거리 위로 몽글몽글 떠오르는 수증기처럼, 입과 코에서 보얗게 피어오르는입김처럼, 기억이라는 게 눈앞에 선명해질 때 나는 비로소 숨을 쉰다고 느껴.
누군가는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 겨울이라고, 추위가 너무 싫다고 말했지만 언제나 나는 겨울이 싫지 않았어.
추위로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겨울이라서.
봄부터 가을까지 돌아보게 만든 게 겨울이라서.
그러니까 한 해가 오롯이 다 담겨있던 게 겨울이라서.
정이 많아서 지나간 시간과 이별할 준비가 안 되었던 나는 못내 추위 속에 벗어나질 못해. 흘러가는 시간을 놓아주지 않으려 주머니 속에 손을 꼭 쥔 채로 거리를 휘적휘적 누빈다.
나에게 온기가 있다는 걸 느끼며
살아있다 살아있다 아직은,
그렇게
한 해가 간다.
하린 (河 물 하, 潾 맑을 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