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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이집사 Aug 14. 2023

학원을 까서 죄송합니다

신념은 자식 앞에서 깨진다

중학교 1학년 아들과 함께 수학 학원을 찾았다. 30여 년 만이다.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절간이 따로 없다. 텅 빈 상담실에 앉아 원장을 기다린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 방학에 영어와 수학 단과반을 두 달 다녔었다. 내게 학원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들도 태어나서 처음이니 13년 만이다. 내가 짬이 안 나, 여름 방학 시작 전 어머니가 손주를 데리고 먼저 학원에 들렸다. 레벨테스트를 마쳤고, 나는 원장과 전화 상담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 직접 방문했다.


극혐까진 아니지만 나는 교과목 오프라인 학원 반대론자이다. 머리를 쥐어짜며 혼자 해나가는 공부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김미경 선생이 방송에서 내뱉은 "사람이 레벨이 어딨어"라는 말이 멋졌다. 나도 학원의 쓸모없음을 주장하고, 그들이 자행(?) 하는 레벨테스트를 맹비난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학원의 안내에 따라 레벨테스트를 쳤고 나와 아들은 학원을 제 발로 찾았다. 아이들은 교과목 학원에 절대 안 보내겠다는 나의 알량한 '신념'이 5년도 안 돼 깨진 셈이다. "유월에는 유월의 논리가, 칠월에는 칠월의 논리가 있다"라고 위안 삼고 말까? 찝찝함은 내 몫이다.


교과목 학원만 안 보냈지, 초등학교 줄곧 예체능은 부지런히 시켰다. 예체능은 '만국 공용어'이고 몸이 평생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또 하나의 신념 때문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켜고 싶었음에도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해야 했던 나의 쓰라린 기억도 이런 고집을 강하게 했다. 50미터 수영장 레인을 유유히 오가고, 귀에 거슬리지 않는 피아노 선율을 들려주는 아들 모습에, 내가 그런 양 흐뭇하다. 나와 붙으면 아직 어림없지만 탁구와 배드민턴도 자세는 나오는 정도고. '부잣집 막내아들'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들이다. 학교 방과 후 교실이나 청소년센터, 구립체육센터를 주로 활용했다.


이와 별개로 아들은 1~2학년 땐 블록 맞추기, 3학년 땐 바둑에 빠졌었다. 달걀 모양 킨더 조이에 덤으로 들어있는 플라스틱 조립 모델을 만지작 거리더니 금세 반했다. 다이소에서 파는 몇천 원짜리 조립제품이 성에 안 차 옥스퍼드, 레고 제품을 사주었다. 한두 번 맞추고 마는 조립품이 너무 아까웠다. 30만 원이 넘는 정품에 손이 떨려, 몇만 원짜리 중국제 짝퉁을 해외 직구해 주는 일도 잦았다. 아들은 해외에서 물건이 오면 좋아라 하면서 거실 한 구석에 조각들을 와르르 부어 놓곤 했다. 며칠씩 쪼그리고 앉아 끙끙거리더니 자기만의 작품을 족족 만들어냈다.


하지만 대가도 컸다. 아들은 눈이 급격히 나빠져 안경 신세를 졌다. 오빠 덕분에 킨더 조이를 무한 흡입한 딸은 이가 일찍 썩었다.


어느 날 동네 산을 오르다가 공원에서 할아버지들이 바둑 하는 걸 지켜보더니 바둑을 하자고 졸라댔다. 나에게 몇 번을 지고 나서 태블릿에 바둑 앱을 깔아주었다. 내가 아들 나이 때 아버지에게 배운 바둑 실력은 오래 못 가서 탄로 났다. 혼자서 두서너 달을 컴퓨터에 몰두하더니 나를 금방 따라잡았다.


3학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종이 접기에 빠졌다.


학교 마치고 돌봐줄 사람이 없어, 아들을 밖으로 '돌려야' 했다.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근처 청소년센터 종이접기 프로그램에 강제로 넣어버렸다. 아뿔싸! 호랑이 새끼를 키울 줄이야. 허구한 날 새로운 종이를 사달라는 아들 등쌀에 힘들었다. 왜 그렇게 좋아하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을 못하면서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종이를 접는 아들을 그냥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요놈이 종이 접기에 들인 시간이 공부 시간으로 얼마나 되는지 속으로 환산하며 속으로 애를 태웠다. 종이접기 책을 사달라고 해서 여러 권 마련해 주었다. 언어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급한 놈이 우물 판다고 자동번역기를 이리저리 돌렸다. 유튜브도 혼자 찾아보며 접고 또 접었다. 동대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 가게가 있다며 같이 가자고 졸라댔다. 평일에만 문을 열어 연가를 내고 따라가 주었다. 종이라면 1,000원짜리 다이소 색종이가 다인 줄 알았던 내가, 프랑스 업체에 해외 주문을 하기도 했다.


'온라인 종이접기 스승' 마리아나 자발라, 제레미 샤퍼, 조 나까시마가 국제종이접기 대회 때 한국에 온다며 가고 싶다고 다. 현장에 혼자 들어가면 휴대폰이 없는데 엄마 아빠와 어떻게 연락하냐고 걱정한다. 그러면서 스페인어의 스자도 모르는 모르는 놈이 자발라는 꼭 만나야겠단다. 코로나 시국으로 대회가 온라인으로 열린 게 아들에겐 아쉬웠겠지만, 나에겐 다행스러웠다.


5학년에는 끝말잇기에 빠졌다. 가족과 돌아가며 하는 게 시시했던지 온라인 끝말잇기 게임을 찾았다. 노트북 즐겨찾기란은 어느새 끝말잇기 홈페이지로 가득해졌다.


6학년을 몇 달 보내더니 누가 말도 안 했는데 술술 정리가 되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면서 공부 모드로 바뀌었다.


올해 아들은 중학생이 되었다. 1학기 반장이 되더니 배드민턴을 배우겠다고 한다. 친구들을 이겨보고 싶다고 하면서도, 배드민턴 아마추어 선수였던 담임이자 체육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인 듯하다. 평일에 두 번 아들을 차에 태우고 체육관에 가서 1:1 레슨을 받게 하고 같이 쳐주었다. 그만큼 나는 시간을 또 쪼개야 했지만 예체능은 얼마든지.



그러던 녀석이 여름방학이 가까워 오자, 이번엔 수학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불쑥 그런다. 공부를 꽤 잘한다는 같은 반 친구가 수학 학원을 다니는데 자기도 다녀야겠단다. 하필 배드민턴 레슨 시간과 겹친다. 어쩔 수 없이 배드민턴을 금요일 하루로 돌리고 학원을 등록했다.


그렇다고 학원이 쓸모없다는 나의 신념은 깨지지 않았다. 신념보다 아들의 의견이 우선이었을 뿐이다.


"아들아! 나는 너에게 교과목 학원을 다니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네가 하고 싶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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