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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이집사 Aug 09. 2023

키보드의 Shift와 생각의 Shift

중요한 건 우열보다 변화

올 초,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 데스크톱 PC를 사줬다. 그런데 이번엔 키보드를 사달라며 엄마를 졸라댄다.


이유가 뭐 하다. 한컴 타자 장문 연습 기준으로 분당 500타가 나와야 하는데 키보드 자판이 딱딱해서 답답해 죽겠단다. 온라인 게임도 할 줄 모르는 녀석인데 선뜻 이해가 안 갔다. 혹시 친구와 채팅을 냐고 물어도 아니라 하니 더 할 말이 없다.


그런데 65,000원짜리 키보드가 필요한 이유가 뭘까? 나는 19,000원짜리를 멀쩡히 잘 쓰고 있는데. 더 이상 아들에게 묻기 싫어 입을 닫았다. 마○에서는 75,000원인데 쿠○에서는 65,000원에 가능하다면서 쿠○에서 사야 한다고 아들이 그런다. 지난 십여 년 지마○만 이용해서 나와 아내의 스마트폰에는 쿠○ 앱이 없었다. 아이고 머리야. 마지못해 앱을 깔고 어렵게 주문을 끝냈다. 씁쓸해하는 찰나, 아들이 아내에게 슬쩍 다가와 현금 65,000원을 내놓는다. 그간 모아놓은 용돈일 텐데 철이 든 건지 뭔 꿍꿍이 인질 모르겠다.


한글 500타를 넘겨야 한다는 아들의 말 때문이었는지, 썩 유쾌하지 않았던 옛 기억이 소환돼 입이 썼다. 대학 1학년 1학기 <컴퓨터의 이해>라는 과목의 기말시험이 한글 타자 200타 넘기였는데, 이를 못 넘어 B 학점을 받은 흑역사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한글을 얼마나 빨리 치느냐로 컴퓨터 실력을 겨루지 않지만, 그때는 한글 타자 속도야말로 뭔가 앞선다는 걸 보여주는 징표였다. 때문에 과 사무실 누나는 최고 인기였다.


수강신청하고픈 과목을 종이에 써서 쭈빗쭈빗 건네누나는 잽싸게 입력해 주었다. 수강신청 변경 등 이런저런 부탁을 하면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가며 해결해 주는 모습도 멋졌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며 타자를 치는 예쁜 누나를 보면서 딸기 우유나 초콜릿을 수줍게 건네곤 했다.


20세기말, 군을 제대하고 나오니 그 사이 세상이 변했다. 도스에서 윈도로 컴퓨터 운영체제가 바뀌고 1인 1PC 시대가 활짝 폈다. 그만큼 텍스트 입력 속도 자체는 의미가 없어졌다. 데스크톱이나 노트북에 한글 타자 연습 프로그램이 깔려있지만 이를 알고 연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살배기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던져주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손가락으로 요리조리 젖히고 누르는 요즘 촌스럽게 무슨 타자 연습이겠는가?


하지만 공용문서나 개인 글쓰기 등 자판을 두르리는 건 여전하다. 그런데 타자를 치면서 느끼는 불편함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먼저 ㄲ, ㅆ, ㅉ 따위의 경음(硬音)이나 이중 모음 ㅒ, ㅖ를 칠 때는 Shift 버튼을 누른 채 해당 자음, 모음을 눌러야 한다. 양손 새끼손가락으로 누르도록 Shift 버튼이 양쪽 아래에 있지만, 여전히 불편한 구석이 있다. 가장 힘이 약한 새끼손가락으로 누른 채 다른 버튼을 누르니 말이다. !, @, # 같은 특수문자야 뭐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지만 단어마다 무수히 들어 있는 경음과 이중 모음을 위해서는 Shift가 반드시 필요하다.


말이 나왔으니, 영어 타자에 대해 몇 마디 해본다면 영어는 우리말보다 입력하기가 수월하다.


무엇보다 문장 첫 단어의 첫 알파벳과, 고유명사는 대문자로 시작하는 경우 말고는 Shift가 필요하지 않다. 즉 영어는 그냥 치는 대로 단어가 입력되는 언어다. Shift 타령을 잠시 했으나, 그래도 한국어와 영어는 자판을 누르는 즉시 결과물이 나온다. 너무 당연한 게 아니냐고? 아니다. 누르고 확인한 뒤 또 눌러줘야만 되는 언어가 있다. 바로 중국어다.


중국어는 한자로 이루어졌는데, 한자는 안타깝게도 자판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중국어는 한자어 발음을 나타내기 위해 알파벳을 이용해 한어병음(漢語拼音)을 만들었다. 즉 한어병음은 한자어 발음의 영어 알파벳 표기인 셈이다.


예를 들면 엄마 妈의 한어병음은 ma, 귀신 鬼의 한어병음은 gui이다. 그런데 중국어 입력 모드로 놓고 ma와 gui를 치면  妈, 鬼가 자동으로 입력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ma를 치면 妈(엄마) 외에 1. 吗(?)  2. 马(말)  3. 骂(욕)  4. 麻(마) 등 ma에 대한 한자가 40여 개 넘게 주르륵 이어진다. 귀신 鬼도 마찬가지다. gui를 치면 1. 贵(부유한)  2. 归(돌아오다)  3. 龟(거북이)  4. 跪(무릎을 꿇다) 등이 또 여남개 늘어선다. 결국 ma, gui를 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기에 알맞은 한자를 다시 고르기 위해 한자에 맞는 숫자를 쳐야 비로소 화면에 妈, 鬼가 입력된다.


키보드로 중국어를 입력하는 게 이렇게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유는 중국어 한자 하나하나마다 성조(聲調)가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한자 喂라도, 말 끝을 올리며 wéi라고 읽으면 (전화를 받을 때) "여보세요?" 뜻이 되지만, 말 끝을 내리며 wèi 라 하면 "이봐요! 저기요!"가 된다. 또 한어병음은 똑같이 da ren인데 达人이 打人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발음이 약간이라도 틀리면  '달인' 김병만이 '폭행범'이 되기 일쑤다. 중국어를 처음 배울 때 그래서 며칠, 몇 주가 되더라도 발음 연습을 충분히 해야 한다.


글이 잠깐 새었는데, 어쨌거나 중국어는 두 차례 입력 작업은 불가피하고 시간도 그만큼 더 걸린다.


물론 중국어 상용어구는 한어병음과 성조가 자동으로 달리기도 하지만,  한국어와 영어보다 입력 시간이 더 걸리는 건 확실하다


재밌는 사실은 중국어 입력과 Shift 버튼의 관계다.


한타와 영타에서 없어서는 안 될 Shift가 중타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오히려 2단계 선택에서 숫자를 눌러서 한자를 골라야 하기 때문에 자판 위 1~9번까지의 숫자가 훨씬 중요하다.


일본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들의 입력 방식은 써보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한국어와 영어는 Shift만 있으면 어느 단어도 단박에 입력 가능하다. 그렇다고 중국어가 한국어와 영어보다 못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콕 집어 말한다면 키보드 자판에서 해당 문자를 입력하는데 좀 번거로울 뿐이지, 언어 자체에 대해서는 한국어나 영어나 중국어 사이 우열을 가리긴 어렵다.


좋든 싫든 개화기 이후 일본을 거쳐 번역되어 들어온 수많은 한자어를 지금 우리말 속에서 아무 저항감 없이 쓴다. 셀카, 오렌지, 카메라, 패러다임, 엘리베이터 등에서 처럼 영어의 한국어 발음을 상당 부분 우리말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자와 영어에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일일이 셈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용자 편의 중심의 문서, 이미지, 영상 편집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무엇이나 처음 접할 땐 두렵고 답답하지만 익숙해지면 또 그게 일상이 되고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소프트웨어가 날 잡아먹을 일도 없으니, 내가 필요한 만큼 골라서 써먹겠다고 생각을 바꾸면(Shift) 되겠다.


단과대 컴퓨터실 시험장에서 손이 떨려 200타를 못 치는 바람에 A 학점을 놓친 나였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글도 쓰고 큰 불편 없이 영상도 편집한다.


이렇게 보면 키보드 위 Shift보다 생각의 Shift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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