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흑염소

잊지 못할 전학 첫날

by 고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가 집 앞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덕분에 부모님의 도움 없이도 8살의 나는 혼자서 씩씩하게 학교와 집을 오고 갔었더랬다.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던 그 학교를 2년 동안 쭉 수월하게 다녔다. 그러다 3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이었던 겨울방학, 본래 살았던 시골집으로 이사를 간 우리 가족(첫 번째 글 '나의 첫 집에 대하여' 참조). 나는 자연스레 시골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부모님은 나를 정말 강하게 키우신 게 맞다. 이제 막 10살이 된 여자아이에게 집에서 1.2km 거리에 있는 학교를, 차를 태워 길을 한 번 보여줌으로써 어떻게 학교에 가는지 알려준 셈 치셨다. 그리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2일, 곧장 나 혼자서 걸어가도록 두었다. 당시엔 시골 찻길에 인도도 없었을 뿐 아니라 신호등도 전혀 없었다. 게다가 속도제한도 아예 없던 시절... 그래서 차들이 달리는 속도는 도시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름' 그 자체였다.

학교 가는 길에 위험요소가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다행이랄까, 나는 워낙 겁이 없는 성정인 데다 길도 잘 외우는 편이어서 시골 학교로의 등굣길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알려준 길을 따라 쭉 걸으면 그만이었니까.

다만 의외의 복병이 있었으니... 학교를 200여 미터 눈앞에 두고 길가에서 흑염소 한 마리와 마주쳤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눈앞에 버젓이 있는 흑염소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더랬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염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강아지는 물론이고 송아지도 만져봤는데 작은 염소쯤이야 별거 아니지란 생각이었다. 나의 손길이 좋았는지 흑염소도 계속 머리를 내게 들이밀었다.

한동안 쓰담쓰담 만지다가 이제는 학교로 가야겠다 싶어 발길을 돌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계속 내 허리에 머리를 바짝 붙이면서 따라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리 가-! 나 이제 학교 가야 해! 너네 집으로 돌아가!"


내 외침은 무시한 채 계속 머리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흑염소 새끼(아마도 새끼일 것이다. 욕 아님!).

내가 입고 있던 새빨간 코트가 염소를 자극했던 것일까 아니면 녀석과 덩치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서 만만해 보였던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염소는 나를 타깃으로 삼은 것이 분명했다. 내가 방향을 틀어 잽싸게 달리자 녀석은 더 빠르게 내달리며 쫓아오기 시작했다. 차라리 개처럼 짖기라도 하지...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부리부리한 눈동자로 날 응시한 채 무작정 바짝 붙어 쫓아오는 흑염소를 보자 점점 공포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으앙!!!"


나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겁이 없는 아이였다 하더라도 고작 10살(만으로는 8살)에 혈혈단신이었다. 내 허리춤만 했던 그 흑염소는 여전히 내게 붙어서 지 머리를 쿵쿵 들이박고 있었다. 곱씹어보니 어지간한 대형견 정도 크기의 흑염소였으니 체급에서도 내가 밀리는 상황이지 않았나 싶다(!). 그럼 새끼는 아닌 건가... 아무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내가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우렁차게 울어재끼는 것뿐이었다(핸드폰도 없던 시절인 데다 시골이라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고학년 선배들이 나의 울음소리를 듣고 내가 있는 쪽을 발견했다. 학교에서 단 100여 미터 앞에 두고(거기까지 나름 도망쳐 온 것이었음) 대치하고 있던 나와 흑염소. 그들은 나의 간곡한 울음소리와 옆에 붙어있는 시커먼 염소가 있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음을 직감했는지 헐레벌떡 뛰어왔다.


대여섯 명의 언니, 오빠들이 합세해서 '나 구출작전'을 펼쳤다. 일단 염소로부터 나를 떨어뜨리는 게 급선무였다. 오빠들은 흑염소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그중 한 명은 염소 몸 주변을 가볍게 탁탁 건드렸다. 학교 반대 방향 쪽으로 염소를 몰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는 사이 잽싸게 언니 두 명이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니? 걸을 수 있겠어?"


언니들은 날 안심시키기 위해 계속 말을 걸었고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며 세심하게 신경 써주었다. 그렇게 언니들의 보호를 받으며 학교까지 무사히 당도할 수 있었다.

첫 만남부터 큰 도움을 받아서였을까? 나를 구해준 언니, 오빠들은 내게 진짜 '멋진 어른'으로 느껴졌었다. 기껏해야 두세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또래 소년소녀들인데도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전학 첫날부터 흑염소로 신고식(?)을 단단히 치른 덕분인지, 나는 전교생이 5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시골 학교에 모두가 알 수밖에 없는 만화 속 전학생(!) 같은 전학생으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흑염소 사건이 있고 나서 여차저차 염소 주인과도 얘기가 잘 됐는지, 이후로 흑염소가 학교 길에 떡하니 나타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내겐 처음으로 만화 속 영웅보다 더 가까운 곳, 현실에 롤모델이 생겼다.

흑염소로부터 날 보호해 준 언니, 오빠들을 통해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지켜주고 도와주는 사람의 '멋짐'을 실제로 보게 된 것이다. 그때로부터 거의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새삼 내가 '멋진 어른'이 됐나 되돌아볼 따름이다.

요즘도 우연히 멋진 사람을 알게 되면 나보다 어려도 '언니' 혹은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 지는데...

어쩌면 이런 추억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응,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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