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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은 달 Jan 31. 2023

우려낸 이야기

30일 쓰기

설연휴, 오랜만에 부모님댁을 들렀다. 겨우 하룻밤을 지내고 서울로 올라가는 날, 차에 같이 실어 보낼 먹거리를 잔뜩 챙겨주신다. 국산참기름, 중국산 참깨, 곱창김, 팥, 말린 치자, 서리태, 메주콩, 멸치반찬, 김치, 냉동탕수육 등 짐이 계속 늘어난다. 급기야 아빠는 냉동실 문을 열고, “니 이거 해묵을 수 있겠나” 하시며 사골뼈 한 뭉치를 꺼내신다.


아빠는 가끔 곰국을 끓여 소분한 뒤 꽁꽁 얼려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들과 함께 택배를 보내주셨다. 방문택배도 있는데 굳이 우체국까지 그 무거운 택배를 들고 옮기실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기에 나도 모르게 선뜻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게 부산집 냉동실의 사골뼈는 자동차트렁크에 실린 채 375km를 달려 연휴 마지막날 우리집으로 도착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마음은 내내 그 뼈에 머물러있었다. 해야 할 숙제를 잔뜩 미룬 기분. 일주일 내내 곰솥을 알아보고 곰국인지 곰탕인지를 요리하는 방법을 찾다 어제저녁 갑자기 마음이 일었다. 꽁꽁 묶인 비닐을 꺼내 몇 겹으로 쌓인 결계를 풀어헤쳤다. 바로 너구나.


일단 핏물을 빼야 한다. 핏물을 오래 빼지 않아도 끓는 물에 한번 데쳐내면 된다는 몇몇 인터넷 검색후기를 따라 짧은 시간만 우려내고 집에 있는 가장 큰 냄비에 욱여넣은 후 살짝 끓여내어 불순물을 제거한다. 끓인 물은 버리고 찬물에 뼈를 깨끗이 씻어낸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한솥 가득 물을 부어 강불에 팔팔 끓인 후 약불로 두세 시간 우려낸 국물을 따로 부어놓는다. 이때 사태부위 고기도 건져낸다. 다시 물을 가득 부어 끓여내고 그렇게 총 3번을 끓여 나온 사골물을 합쳐 냉장고에 하루 재운 후 굳어진 윗기름을 걷어내어 버린다.


해냈다. 생애 처음 곰국을 성공했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사용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끓여냈다. 따로 빼놓은 고기를 합쳐 한번 끓이고 식혀 준비된 육수팩에 담아 냉동실에 얼리면 한동안 든든한 국거리가 생긴다. 딸가족의 먹을거리를 준비해 주신 엄마, 아빠의 일을 나도 해냈다.


쫑쫑 썰어놓은 파와 구운 소금, 반찬거리를 눈에 잘 띄는 곳에 챙겨두고 밥솥에 밥이 충분한지 확인 후, 일이 있어 서둘러 집을 나선다. 안녕, 엄마는 갈게. 3박 4일쯤 떠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흔한, 그렇지만 좀처럼 어려운 저녁약속이 있는 날이다. 집에 돌아온 가족들이 배불리 맛있게 먹길, 그리고 아이들은 일찍 잠들길.





냄비 옆에 반달 모양의 손잡이를 들손이라 부른다. 그 들손이 달린, 밑바닥이 둥근 노랗고 커다란 솥을 들통이라 일컫는다. 그 노란 들통이 문득 떠오른다. 어릴 적 엄마가 곰국, 장어탕, 추어탕 등 각종 탕거리를 무수히 끓여내어 닳고 손탄 그 들통 말이다. 아마 지금도 부모님댁 다락 어딘가 다른 오래된 물건들 사이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지난한 시간, 자식 셋과 남편의 삼시세끼를 책임지던 엄마의 노고가 녹아있는 들통이 문득 그리운 저녁이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쉬우면서도 어려운 곰국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날을 기념하며 이렇게 긴 글을 남긴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소의 뼈와 사랑의 마음을 우려낸 곰국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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