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ing myself
나는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서 태어났다. 집에서 산파의 도움으로 태어났는지 병원에서 태어났는지는 알길이 없다. 살면서 궁금한 적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어머니께 전화로 여쭤볼 만도 하지만, 어쩌면 지금껏 내가 나의 출생과정을 몰랐던 이유는 부모님께서 당시의 가난과 얽힌 서글픔까지 알려주고 싶어하지 않으셨던 것은 아닌가 짐작하며 그냥 묻어두기로 한다.
사실 내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 태어났건 나에게 그다지 중요치 않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보면 돈암동 달동네 꼭대기에 하나같이 가난한 외갓집 가족들과 옹기종기 모여 살며 가장 어린 막내조카로 사랑을 듬뿍 받은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돈암동 달동네. 내가 첫 걸음을 떼고 글자를 깨치고 가난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수 있었던 곳이다.
우리는 무허가 주택에서 여섯 가구쯤이 함께 사용하는 공동 푸세식 화장실을 쓰는 법을 익히며 자랐다.
오줌은 집 안 부뚜막 근처에서 누고 물을 부시면 되지만 밤에 똥이 마려우면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언니와 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했다. 공용화장실에 다마가 나가면 한사람이 후라시를 비춰 주고 문을 지키고 서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땐 귀신이 더 무서운지 자칫 발을 헛디뎌 똥통에 빠지는게 더 무서운지 견주기 어려웠다.
똥더미들은 생명력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수천마리의 구더기들이 그 나름의 생존의 움직임을 치열히 하고 있었다.
만 일곱살에 부천으로 이사를 해서야 우리 집에, 정확히는 집 안에 설치된 수세식 변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제 밤에 똥이 마려워도 언니를 깨우지 않아도 되었다. 똥통에 빠질까 무서워 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저 귀신만 무서워하면 되었다.
수세식 변기가 있는 방 두칸짜리 집으로 옮겼을 땐 우리집이 많이 부자가 된것 같았다.
그러나 돈암동은 여전히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롱져있는 곳이다. 그 당시엔 남산 타워 쪽에서 불꽃놀이를 많이 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마 그 당시가 88올림픽 때여서 그랬던것 같다. 우리 집은 달동네 꼭대기여서 남산 타워에서 터뜨리는 불꽃놀이가 아주 잘 보였다. 어린 나와 함께 멀리 보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나의 부모님은 가슴속에 어떤 희망을 키우고 계셨을까? 그 당시 희망이란 걸 품으실만한 여유나 있으셨을까?
최하층의 도시빈민 중 한 가정이었던 우리 가족은 예쁘고도 아픈 이름 '달동네'에서 예쁘고도 아픈 삶을 살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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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5살 이른 나이에 목숨을 조여오는 암을 경험했을 당시에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단 하루를 살아도 꽉찬 생명력으로 살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항암치료가 끝날 즈음부터 사회로의 복귀를 준비하면서 오히려 건강에 대한 염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욱 커져갔습니다.
생명력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과 생의 집착의 차이는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 있다는 걸 너무 젊은 나이에 알아버렸습니다.
지금도 무시로 죽음이 두렵습니다.
림프종양이 있었던 자리가 아플때, 배가 아플때, 머리가 아플 때마다 또 다른 암이나 질병은 아닌지 공포에 휩싸입니다.
비명횡사 천재지변 미인박명 등 제가 오늘 죽을 이유나 확률이 오늘 살아남을 이유나 확률만큼이나 많고 높은데 말입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관문, 그 문이 언제 내 앞에 다시 열릴지 알수 없기에 매일 잘 죽을 준비를 하고자 합니다.
첫째, 갈때 가더라도 학자금은 갚아놓고 가고 싶습니다.
둘째, 인터넷에 떠도는 나의 생각의 편린들을 갈무리하면서 천박하고 경솔했던 글들은 지우고 솔직담백하게 나의 개인사를 적어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면 잘 죽을 준비와 더불어 덤으로 얻어지는 하루하루들을 잘 살 준비도 될것이라 여겨집니다.
나는 잘 살아감으로 잘 죽어가고 싶고
잘 죽어감으로 잘 살아가고 싶은데
그것이 또한 '구원'이라 부를 만 할텐데
왜인지 지금의 이 기록들이 그렇게 될것같은 느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