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달동네와 엄마등

Saving myself

by 달꼬마

누가 먼저 그곳에 터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외가 친척들은 80년대의 끝자락을 돈암동 달동네에서 함께 했다. 그 말은 우리가 가난했다는 뜻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외삼촌과 결혼한 외숙모, 이모들과 결혼한 이모부들에 우리 엄마와 결혼한 아빠, 그리고 그분들의 가족들까지 하나 같이 가난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가난했고, 고졸이 최고학력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나름의 행복을 찾으며 살았다. 그나마 넓은 마루를 갖고 있는 외삼촌 댁에 빙 둘러앉아 식사를 함께 했고, 함께 여행도 갔다.


호랑이 외삼촌은 가끔 나를 혼내셨고, 나는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품으로 달려가면 이상하게도 온가족이 모두 웃으며 즐거워했다.

엄마도 빙긋이 웃으며 나를 달랬다.

엄마 등에 가만히 머리를 고인 채 설움을 달래고 있노라면 등을 통해 들려오던 '오독오독' 깍두기 씹는 소리, 도란도란 엄마의 목소리, 포근한 온기에 어느덧 눈물을 멈추고 딸꾹질로 나의 마지막 남은 설움을 토해냈다.


지금은 엄마와 둘도 없는 친구임에도 엄마와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일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도 어색하다. 그러나 어릴 때의 그 포근한 기억이 지금의 엄마와 나 사이의 영혼의 탯줄이 되어 우리를 '우리'되게 한다.


어떤 날은 엄마에게 무언가 토라져서는 책가방을 챙겨 메고 수원 사는 이모네로 떠날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엄마에게 날 붙잡을 기회를 주기 위해 천천히 신발을 신고 문을 소리 나게 열고 닫으며 마당까지 나왔는데 엄마가 따라 나오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나 싶어 몇 번을 더 소리쳤다.

"나 수원 이모네 갈 거야. 이모네서 살 거야"


사실 수원 이모네 어떻게 가는 지도 몰랐고,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모네서 살겠다는 나의 결정을 이모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마당에서 빨갛고 네모진 책가방을 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토라진 척 땅만 쳐다보던 나에게 엄마는 '어부바'하며 등을 내어주었다.

못 이긴 척 엄마 등에 슬며시 업히자 엄마는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마음이 풀어진 나는 어느새 엄마 어깨에 살그머니 손을 얹고 얼굴을 파묻었다. 국민학교 1학년 만 6살의 가출 시위는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철부지 막내딸의 눈물로 촉촉이 젖은 넓고 따뜻한 엄마의 등.

돈암동 달동네의 추억 중에 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이다.


고마워요. 엄마.

엄마의 등에도 내 작은 뺨의 온기가 아직 묻어 있으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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