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ing myself
50년 소띠인 아빠는 서른네 살 때, 59년 돼지띠인 엄마는 스물다섯 살 때 나를 낳았다. 다른 아빠들에 비해 우리 아빠는 조금 나이가 많았고, 다른 엄마들에 비해 엄마는 조금 나이가 적었다.
나이차도 9살이나 났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우리 아빠 엄마가 평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서울 마포구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다. 3형제 중 둘째로 자라면서 밑으로 동생을 잘 챙기고,위로는 형님을 잘 섬기는 착하고 보수적인 형제애를 가졌다.
아빠는 가정의 질서를 추구했다. 언니와 나 사이에 강한 위계를 세웠다. 나와 거의 두 살 차이인 언니는 나의 우상이요 법 그 자체였다. 나는 언니가 무서웠다. 물론 대들기도 많이 대들었지만 그때마다 아빠는 언니 편을 들었다. 왜냐하면 '언니는 언니니까'. 다른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아빠의 세대에는 그것이 합리적이었지만, 어린 나는 세뇌당하지 않았다. 난 그것이 늘 불합리하다 여겼고 아빠가 아무리 언니에게 힘을 실어줘도, 나는 늘 반란과 체제 전복을 꿈꿨다.
사람마다 타고나는 천성이 있다. 둘째인 아빠는 늘 큰아빠를 잘 섬겼다. 큰아빠가 아무리 불합리하고 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아빠는 단 한 번도 형제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았다. 그런 아빠 밑에서 같은 가치를 주입받아 자랐어도, 난 그것에 순응하지 않았다. 결국 부모가 자녀의 성격 전부를 좌우하지는 않는다. 부모의 훈육, 환경, 타고난 기질, 본인의 의지 등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한 사람의 성격을 형성한다.
아빠의 훈육은 나름 독특한 부분들도 있었다.
다섯 살 때 아빠가 나에게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쳤다. 작은 바늘과 큰 바늘을 설명하면서 큰 바늘이 12에서 5로 가면 5분이라고 했다. 5분이라는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아빠는 무릎 꿇고 5분 버티기 제안을 했다. 무려 500원의 상금이 걸린 달콤한 제안이었다. 어린 나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5분이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무릎 꿇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탁상시계를 앞에 두고 나는 무릎을 꿇었다. 누워서 식은 죽을 먹는 것보다 쉬워 키득키득 웃었다. 큰 바늘이 1로, 2로 향하면서 나는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리가 저리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5분을 못 참고 울면서 패배를 선언했다. 5분은 긴 시간이었다. 아빠는 웃으며 시계를 거둬 바늘을 원래대로 맞췄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경쟁을 좋아하는 내 기질을 알고 그것을 이용해서 시간 개념을 가르쳤던 것 같다.
우리 어렸을 때는 이집 저 집 참 많이 맞고 살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아빠는 우리를 때리며 훈육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칠 땐 아빠도 무력을 썼지만, 우리가 어렸을 땐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가 우리에게 매를 들 때가 있었다. 바로 언니와 내가 싸울 때였다. 언니와 내가 싸우기 시작하면 말로 타이르다가 싸움이 격해지면 언니와 나를 둘 다 불러 한바탕 훈계를 했다. 다른 집과 비슷하게 싸움의 이유를 묻고, 언니는 동생에게 잘하고, 동생은 언니에게 대들지 말라는 건전한 교훈을 줬다.
그리고는 30센티 자를 꺼내어 '몇 대 맞을 거야. 정해!'라고 물었다.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는 '몇 대 맞을 거야'에 비하면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짜장면이든 짬뽕이든 어쨌든 먹어서 좋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대 맞을 거야'는 'or 맞지 않을 거야'라는 전제 없이 일단은 무조건 맞아야 하는 것이었다. 언니와 눈치싸움도 해야 했다. 언니는 다섯 대를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열대를 말한다면 뭔가 억울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쭈볏쭈볏 눈치를 봐가며 먼저 말한 사람을 따라 매값을 매겼다.
그러면 아빠는 우리가 말한 매값에 따라 매를 지불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았다. 아빠의 매가 맵지 않다는 것을.
이번에는 세게 맞을까 긴장이 되긴 했지만 아빠는 늘 아프지 않게 살살 때렸다.
아마도 이미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매값을 정하면서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서 벌을 내린 것에서 훈육은 전부 이루어졌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빠가 우리에게 매를 드는 단 한 가지 경우는 우리의 우애가 깨지는 때였다.
아빠가 큰아빠를 공경하고, 작은 아빠를 잘 보살폈던 그 가치관으로 당신의 두 딸을 훈육했다. 아빠에게 우애는 소중한 가치였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언니와 나는 수많은 싸움과 용서를 반복하며 얻은 이해와 지지 가운데 나름 우애 깊은 관계를 해나가고 있다. 아빠가 형과 동생에게 베풀었던 무조건적인 형제애 같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의 기질과 자매관계라는 또 다른 설정 안에서 우리가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왔고 지금도 찾고 있다.
지나고 보니 아빠는 우리가 어렸을 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알았고, 아빠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도 닮기를 바랐다.
지금은 내가 생각하는 것의 전부를 아빠가 알 수 없고, 아빠의 지혜와 경험을 아직 내가 따라잡을 수 없지만 이렇게 내가 글을 쓰고, 아빠가 이것을 읽다 보면, 우리가 죽기 전까지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 더 가까운 부녀지간이 될 수 있겠지.
아빠, 잘 읽고 있죠?
언니랑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게요.
걱정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