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진행 중인 이야기
이 글은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버팀과 누림이라는 두 개의 개념을 풀어내기 위해, 세 명의 여성이 사례로 등장했다.
그녀들이 기혼인지, 아이가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다른 시간을 버티고 있는 인생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글 자체가 하나의 변주가 되었다.
에세이로 시작했는데 소설이 되었다가, 다시 에세이로 돌아왔다.
개념을 쓰다 보니 사례가 필요했고,
사례를 쓰다 보니 인물이 생겨났고,
인물을 따라가다 보니 삶이 따라왔다.
주제는 변하지 않았다. 버팀과 누림.
달라진 것은 그들을 표현하는 리듬과 속도이다.
글의 형식이 출렁거린 것조차 결국 버팀과 누림의 또 다른 변주였을지 모른다.
그렇게 쓰는 동안, 그녀들은 점점 살아났다.
민서에게 투병은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제다.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질병의 무게는 여전히 깔려있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 모두에게.
불안은 투병의 현실을 통제 속에 가두고 삶을 유예시킨다.
민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배우는 중이다.
삶을 유예하지 않고 현재를 사는 법, 불안을 없애려 하는 대신 그 무게와 함께 숨 쉬는 법, 그 안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말이다.
도연은 오랫동안 타인의 요구 속에서 존재를 증명해 온 사람이다.
그래서 역할과 책임은 그녀를 움직이는 동력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짓누르는 무게이기도 했다.
퇴직 이후, 일이 끊겼던 시간을 보내며 그녀는 자신을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과 마주했다.
조직이 부여한 책임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책임은 무엇인지.
그때 떠오른 단어 하나.
주도권.
누군가의 밑에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자리에서 책임을 지고 싶다는 마음.
현실이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지만 그 바람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하진은 늘 혼자 해결해 온 사람이다.
프리랜서로 살아온 그녀에게 완결은 생존이었다.
능력은 방패였고, 거리 두기는 안전장치였다.
깊은 관계는 좀처럼 불편했다.
먼저 거리를 두고, 미리 물러나고 감수할 수 있는 정도만 나아갔다.
하지만 멈춘 관계의 자리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드러났다.
그 결핍이 그녀를 다시 사람들 사이로 밀어 넣었다.
누군가의 속도에 맞추는 일, 자신의 빈틈을 드러내는 일이 아직도 하진에게는 버겁다.
다만 예전처럼 도망치지만은 않는다.
우리는 모른다.
하진이 끝내 관계 속에 스며들 수 있을지,
도연의 기대가 현실에서 어떤 답을 만날지,
민서가 불안의 무게를 얼마나 가볍게 할 수 있을지.
이 글이 말하려 한 것은 완성된 결말이 아니다.
반복되는 버팀과 누림 속에서 삶을 찾아가는 여정. 그 걸음 자체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인생 찾기와 관계 속 좌충우돌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이 남는다.
'당신의 버팀은 지금 어느 지점에 있는가. 그 버팀 속에서 당신은 어떤 태도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가.'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그것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버팀은 흐르고 누림은 그 위에서 리듬을 바꾼다.
변주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버팀과 누림의 변주 연재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