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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n 30. 2016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좌충우돌 기생충 생존기 <서민의 기생충 콘서트> ㅣ 과학서평


19세기 말 이탈리아의 터널 공사장에서 한 인부가 쓰러져 숨을 거둔다. 직접적 사인은 빈혈이었다. 건강하던 인부가 왜 갑자기 빈혈로 목숨을 잃었을까? 부검을 해보니 인부의 소장(小腸)에서 1,500마리가 넘는 기생충이 나왔다. 빈혈 증세를 보이던 다른 인부의 대변에서도 기생충이 검출됐다. 빈혈을 일으키는 ‘구충’은 이렇게 발견됐다. 


구충은 숙주의 장에 매달려 피를 빨아먹는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친다. 덕분에 ‘기생충계의 드라큘라’라는 무시무시한 별명도 갖고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구충은 ‘착한 기생충’이다. 구충 한 마리가 빨아먹는 피의 양은 겨우 0.15㎖ 정도에 불과하다. 1,000마리쯤 모이면 사람에게 치명적이지만, 이탈리아 터널 공사장이 인부와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구충은 피를 굳지 않게 하는 성분을 분비하기 때문에 천연 항응고제를 개발의 가능성도 제공한다. 무엇보다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의 치료에 쓰인다. 심지어 구충을 파는 인터넷 사이트도 생겼다. “크론씨병 같은 염증성 장 질환은 물론이고 천식, 습진, 알레르기 등 면역질환에 효과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의 홍보 문구다. 


구충의 모양과 부위. <사진=책 본문 중에서>


물론 ‘나쁜 기생충’도 있다. 1990년, 14개월 된 여자아이가 고열로 병원에 왔는데 CT를 찍은 의사들은 깜짝 놀랐다. 간과 비장이 비대해져 여자아이의 아랫배까지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간 조직 검사를 해보니 수많은 알이 발견됐다. 알을 낳은 기생충은 ‘간모세선충’이었다.  


여자아이는 운 좋게 살았지만, 간모세선충은 사람을 죽이는 몇 안 되는 기생충 가운데 하나다. 주로 흙을 만진 손을 통해 사람의 입으로 감염되는데, 이 기생충 감염자 가운데 아이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간모세선충 환자의 생존 확률은 40%도 안 된다. 물론 정확한 진단만 나오면 회충약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이 정도면 ‘기생충계의 연쇄살인범’으로 부를 만하다. 


◇좌충우돌 기생충 생존기 


이렇게 좋은 기생충도 있고, 나쁜 기생충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이상한 기생충도 많다. 공통점은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 생김새도 그렇지만, 우리 몸속에 소리 없이 침입해 허락도 없이 기생하며 영양분을 뺏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협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특성 때문에 기생충은 지구의 이인자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기생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많이 박멸됐다고 해도 기생충의 완전 퇴치는 불가능하다. 생명체가 살아있는 한 기생충도 살아남게 될 것이다. 기생충이 사라졌다는 것은 생명체가 사라졌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해법은? 기생충을 조금 더 잘 이해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저자 서민 교수.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글을 쓰다 이제는 '글쓰기 전도사'가 되었다. <사진=시사인>


<서민의 기생충 콘서트>는 이렇게 인간과 기생충이 공생할 수밖에 없다면, ‘그 녀석들 얼굴과 이름은 알고 살자’는 취지에서 쓴 책이다. 그래서 ‘기생충 박사’ 서민은 그 녀석들에게 어떤 우호감도, 반대로 어떤 적대감도 표출하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때로는 기생충의 관점에서 말하기도 한다. 숙주인 사람의 간에 서식하며 영양분을 얻고 알을 낳고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잔인한 간모세선충이지만, 기생충의 변명을 듣고 보면 그것은 이 기생충의 생존 본능일 뿐이다. 지구 이인자로서의 패기마저 느껴진다. 


기생충은 숙주, 특히 종숙주를 죽이지 않지만, 어쩌겠니? 내 자식들이 살고 봐야지. 숙주를 없애기 위해 난 알을 아주 많이 낳을 거야. 간경화 정도는 생겨 줘야 숙주가 죽을 것 아니겠니? (…) 기생충의 목적은 자손 번식이니까. 계속 이렇게 살다 보면 조만간 우리의 시대가 열리지 않겠지? 자, 이제 숙주가 죽어 가고 있다. 어서 밝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렴.


◇남녀차별 기생충, 약자만 노리는 기생충 


어쩌면 기생충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는 저자인 서민 교수인지도 모른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주문한 것도 기생충에 끌려서가 아니라(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순전히 저자에 끌려서다. 어찌어찌 해서 '글쓰기 전도사'가 된 그는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는 글쓰기를 강조한다. 


기생충 박사 서민 교수. <사진='생각정원' 블로그>


2013년 출간한 <기생충 열전>의 속편에 해당하지만, <기생충 열전 2>가 아니라 <기생충 콘서트>로 제목이 바뀐 저간의 사정을 꽤 장황하게 설명한다.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인데 그 사이 ‘글쓰기 아이콘’으로 부상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잔뜩 배어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생충 열전>을 세상에 내보낼 때 전 무척 초조했습니다. 이 책마저 망하는 다시는 책을 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지요. <서민의 기생충 콘서트>를 내보내는 지금, 전 다른 의미로 초조합니다. 저의 필생의 역작을 과연 독자들이 알아봐 주실 것인가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기생충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만 분류되는 것이 아니다. 숙주가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사는 ‘더불어 살자파’도 있고, 알이나 유충을 종숙주에게 보내기 위해 중간숙주를 죽이는 ‘나 혼자 살자파’도 있다. 때로는 숙주를 돕고 때로는 잔인하게 죽이지만, 기생충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다. 자손 번식. 


장기간 인체에서 암약하는 기생충도 있다. 크루파스파동편모충은 대부분 수개월 안에 죽지만, 일부는 수십 년 동안 인체에 기생하며 심장을 갉아먹는다. 이 기생충은 인체에 들어오면 조금만 증식한 뒤 바로 조직 속으로 숨어버려서 잘 발견되지 않는다. 감염자 대부분 어릴 적에 감염되지만,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의리와 책임감의 상징 기생충 ‘시토모아 엑시구아’. <사진=출판사 페이스북>


기생충 주제에 남녀를 차별하는 녀석도 있다. 성병으로 분류되는 기생충으로 오직 사람만을 숙주로 삼는 질편모충이다. 이 기생충은 환경이 맞지 않는지 남성의 몸에서는 열흘도 못 견디지만, 여성의 몸에서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 동안 살면서 고통을 준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기생충도 있다. 왜소조충은 평소에는 온순하지만, 숙주의 면역체계가 약해지면 유충들이 숙주의 몸 곳곳을 공격한다. 


고래회충처럼 사람들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한다. 작년 매스컴에서 ‘위벽 뚫는 고래회충’이라는 보도가 잇달아 생선회를 피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보도인지를 알리기 위해 저자는 그해 ‘서민 교수, 고래회충에 감염돼 입원’이라는 만우절 글을 올리기도 했다. 고래회충이 위를 뚫지도 않을뿐더러 회를 먹어도 감염률이 0.001%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21세기에는 기생충 시대가 온다?”  


자신감 넘치고 흥미진진하게 얘기를 풀어가던 저자는 국내 기생충학의 현실을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인다. 서문에서 이런 말 덧붙인다. “눈 밝은 독자분이 많기를, 그래서 학생이던 저를 꼬실 때 했던 ‘21세기엔 기생충의 시대가 온다’는 예언이 실현됐으면 좋겠습니다.”  


필생의 역작을 독자들이 알아볼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교수가 했던 말은 그저 제자를 꼬시기 위해 했던 거짓말이 분명하다. 21세기가 됐지만, 기생충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특히 그렇다. ‘쉽고 재미있게’만 쓴 것은 아니다. 의학이나 약학보다 상대적으로 저변이 넓지 않고 인기도 떨어지는 국내 기생충학의 현실에 대한 토로도 담겨 있다. 


영화 <연가시>의 한 장면. 국내에는 연가시를 연구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영화 <연가시>가 화제를 몰고 왔을 때, 연가시를 연구한 게 아니라 논문을 통해 얻은 지식밖에 없는 자기 같은 사람이 ‘연가시’에 대해 인터뷰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엔 이 흥미로운 연가시를 연구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연가시는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기생충인데 말이다.”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기생충 퇴치 약물을 개발한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일본 기타사토대 오무라 사토시 명예교수와 미국 드류대 윌리엄 캠벨 교수, 중국 전통의학연구원의 투유유 교수가 주인공이었다. 오무라와 캠벨 교수는 회선사상충 치료제를, 투유유 교수는 말라리아 퇴치에 탁월한 약물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들은 제3세계의 기생충 퇴치에 혁혁한 공을 인정받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학생 서민을 꼬셨던 그 교수의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다만, 그 말은 이렇게 바꿔야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21세기 기생충의 시대가 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오지 않았다.”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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