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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an 08. 2017

우리는 얼마나 작고 초라한가

우주를 통한 사유와 성찰 <창백한 푸른 점> ㅣ 과학서평



과학이 세계를 점령하고 있다는 신호는 믿을 수 있는가? 적어도 이 기사를 보면 그렇다. 허핑턴포스트는 2015년 ‘과학이 세계를 점령하고 있다는 다섯 가지 신호(5 Signs that science is over the world)’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전한다.


과학이 또다시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려고 한다는 신호가 여러 가지 있다. 과학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정복할 것이며, 조만간에 모든 것을 조정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 거대한 현상이 이제 겨우 시작인 것 같으니 과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다행인가?


안타깝게도 2016년 우리가 받은 신호는 과학의 종말에 가깝다. 가장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이야 할 대통령 연설문을 한낱 사이비 교주의 딸이 ‘컨펌(comfirm)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 이성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천박한 동네 아줌마 한 명이 대통령을 앞세워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이 앞에서 어떤 논리도 무용지물이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1,000일이 다 되도록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 없이 여전히 의혹만 난무하는 현실에서 과학은 이미 조종(弔鐘)을 울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반문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과학이 점령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가?




우주는 사유와 성찰의 바다이자 과학의 최전선


우주는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선이다. “우주의 기운을 모아”,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돕는다”와 같은 최고 통치자의 말에서 또 한 번 과학의 종말을 목격한다. 여기서 우주는 신성한 종교론적 사고, 혹은 우울한 종말론적 관점과도 거리가 멀다. 그저 무속과 사이비 종교가 뒤범벅된 정체불명의 대상이다. 숨겨놨던 욕망의 노골적인 표출일 뿐이다. 국가의 사유화를 넘어 우주의 사유화까지. 그래서 그 말은 응원이나 축복의 메시지가 아니라 일종의 주술로 들린다. 차라리 저주이거나.


우주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사유와 성찰의 바다이자 과학의 최전선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주를 통한 호기심과 사유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하게 되는 당연한 반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990년 2월 보이저호가 64억km의 거리에서 촬영한 지구. 파란 색 동그라미 속 희미하게 보이는 점이 지구다. <사진 출처=NASA>


이러한 그의 철학은 「창백한 푸른 점」에서도 계속된다. 우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은 호기심과 사유를 넘어 겸손과 성찰로 이어진다.


지구는 우주라는 광활한 곳에 있는 너무나 작은 무대이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려고 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정복자들이 보여준 피의 역사를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의 한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이,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다른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잔혹함을 생각해보라.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지난 1994년 이 책이 출간된 후, 제목으로 쓰인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은 이제 지구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지구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살지만, 지구라는 단어에는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창백한 푸른 점에는 생명뿐 아니라 감정까지 존재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이 제목을 애용하고 인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지구라는 이름보다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말에 더 끌린다. 광활한 우주의 한 점, 그것도 창백한 푸른 점에서 또 한 점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노라면, 겸손까지는 아니지만 잠시라도 숙연해진다.


1990년 2월 14일, 그날은 밸런타인데이였지만, 천문학자와 우주공학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 뜻깊은 날로 기록된다. 이날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는 한 장의 사진을 전송한다. 지구였다. 당시 보이저 1호와 지구의 거리는 64억km. 너무 멀어 사진 속의 지구는 픽셀조차 되지 않는 작은 점(혹은 얼룩)으로 보인다. 당시로써는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촬영한 지구 사진이었다. 보이저의 우주 탐사 계획에 참여했던 칼 세이건이 이 사진 촬영을 제안했을 때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고 한다.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칼 세이건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 사진 촬영에 성공한다. 칼 세이건은 이 사진에 영감을 받아 「창백한 푸른 점」을 저술했다. 그리고 당시 사진을 본 소감을 이렇게 기록한다.


여기 있다. 저것이 우리의 고향이다. 저것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삶을 영위했다. (중략)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저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외롭 , 하지만 "그곳에는 사람 "


그렇다. 지구는 우주의 먼지와도 같다. 우주에는 대략 1,000억 개의 은하가 있다. 각각의 은하에는 1,000억 개의 별이 있다. 모든 은하를 다 합치면 별의 수는 1,000억×1,000억 개나 된다. 또 적어도 별의 수만큼이나 행성이 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은하의 거리는 무려 250만 광년(1광년=9조4,600억km)에 달한다. 얼마나 먼 거리인지 짐작하기 어렵다면 태양과 지구(1억5,000만km), 명왕성과 지구(평균 58억km), 그리고 유일하게 인류가 발을 내디딘 달과 지구(38만km)의 거리를 참고하자.


968년 12월24일 아폴로 8호에서 촬영한 지구. 역시 푸르고 창백하다. <사진 출처=NASA>


책은 이러한 우주에 경외심을 품고 보내는 헌사인 동시에, 우주를 향해 탐험을 떠난 인류에 존경심을 담아 보내는 찬사다. 서문 ‘방랑자들’을 통해 인류의 조상이 대륙을 탐험하고, 시선을 하늘로 돌려 하늘과 별을 관측했던 이야기로 시작하는 대서사시는 마지막 22장 ‘은하수를 발끝으로 누비며’에서 앞으로 우주의 행성에 정착하게 될 인류의 미래와 이들이 바라보게 될 지구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 사이 21개의 장에서는 보이저 1, 2호와 아폴로 17호의 우주 촬영 영상을 비롯해 달과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에 이어 명왕성까지 이어지는 인류의 우주 탐사 여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전작 「코스모스」에서 다뤘던 우주와 지구, 생명의 탄생, 그리고 이 거대한 비밀을 풀어낸 과학이라는 열쇠를 틈틈이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책은 시선은 우주를 향해 있지만, 저자의 목소리는 지구와 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살고 있는 인류를 향해 있다.


1968년 크리스마스이브였던 12월 24일, 달 탐사 유인우주선 아폴로 8호에 탑승하고 있던 세 명의 우주인은 우연히 달 표면 위로 지구가 떠오르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른바 지구돋이(Earthrise). 이들은 우주선 작은 창문에 달라붙어 넋을 놓고 이 장면을 바라보다 셔터를 누른다. 우주에서 응시한 지구는 푸르고 창백하다. 1968년 아폴로 8호, 그리고 1990년 보이저호에서 찍힌 지구는 외롭고 슬퍼 보인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곳에는 사람이 산다.”


2016년 촛불을 밝히느라 지치고, 과학의 종말을 지켜보느라 힘들었던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우리가 시급히 회복해 할 것은 사유와 성찰의 자세, 과학 기반의 합리적 사고다. 책에 답은 없다. 적어도 고민의 실마리는 제공하리라 믿는다. 앞이든 뒤든 「코스모스」를 함께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다. 많은 사람이 「창백한 푸른 점」의 제목, 혹은 책의 내용을 인용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인용은 JTBC 손석희 사장의 앵커브리핑이다. 2015년 11월 12일. 그날은 대학 수능일이었지만, 새해를 시작하는 응원의 메시지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넓은 은하계 한구석, 희미하게 웅크린 창백한 푸른 점 하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희미한 점은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질량을, 한없는 밀도를,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미한 시절을 버텨낸 이들은 이런 응원의 말을 건넵니다. ‘웅크린 사람은 뛰려는 사람이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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