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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Apr 02. 2017

시와 책으로 쓴 '사랑에 관하여'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



사랑이 끝난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홍상수 감독은 시인과 소설가의 입을 빌려 말한다. 먼저 시가 있다. 


벗어야 하리라

벗어야 하리라 

벗어 던져야 하리라


꽉 찬 그리움도 

훌훌 씻어버려야 하리라 


만나지 못해 발동동

만나서 더욱 애달픈 아픔도 


미련없이 잊어야 하리라 

툭! 벗어 던져야 하리라  


영화에 등장하는 윤중 박종화의 시 ‘감나무’ 전문이다.  천우(권해효)가 식당에 걸려 있는 이 시를 읽는다. 식당의 이름도 감나무다(실제 식당에도 그 시가 걸려있다고 한다). 영화의 제목은 다른 시에서 차용했지만, 영화의 구성은 아무래도 이 시에서 힌트를 얻은 듯 하다. 


영화는 독일 함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1부, 강원도 강릉을 배경으로 한 2부로 나뉜다. 1부는 ‘만나지 못해 발 동동’ 구르는 영희(김민희), 2부는 ‘만나서 더욱 애달픈’ 사연이 등장한다.  


1부 함부르크 공원의 벤치, 영희는 말한다. “나는 안 기다려. 오고 싶으면 오겠지.” 우리는 안다. 영희가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2부 강릉의 한 식당. 상원(문성근)은 눈물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한다. “후회하는 것에서 벗어나야지. 매일 후회해. 계속  후회하면 달콤해져.”  


식당 '감나무'에서 천우는 벽에 걸린 시를 읽는다. 시는 윤중 박종화 시인의 '감나무'. 


만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만나서 더욱 애달픈 사랑. 시인, 아니 감독은 말한다. 벗어던지라고, 툭, 벗어던지라고. 미련없이 잊으라고. 시 감나무는 이렇게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이번에는 노래다. 노래가 시의 메시지를 이어받는다. 영희가 선배들이 운영하는 카페 ‘봉봉방앗간’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애잔하게 부르던 그 노래다. 홍상수 감독이 직접 작곡하고 노랫말도 지었다고 한다. 들어보자. 


바람 불어와 어두울 땐

당신 모습이 그리울 땐

바람 불어와 외로울 땐

아름다운 당신 생각

잘 사시는지 잘살고 있는지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됐는지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됐는지 


감독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말처럼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시인은 벗어던지라 하지만, 잊으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겠는가. 그래서 바람 불어 어둡고 외로울 땐 그리움이 밀려올테고, 잘 사는지 생각하게 될 터. 그래서 시는 그래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지만, 노래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현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번엔 소설이다. 시와 노래에 이어 홍상수 감독은 이번엔 소설가의 입을 빌려 사랑과 이별을 말한다. 상원은 영희에게 책을 선물한다.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다. 상원은 식당에서 책 속의 한 구절을 읽는다. 


“헤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객실 안에서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둘 다 자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난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녀는 내 가슴에 몸을 맡겼습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녀의 얼굴, 어깨, 그리고 눈물 젖은 손에 키스할 때, 그때 우리는 정말 불행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버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고, 사소한 것이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화 감독 상원(문성근)은 영희에게 책을 선물하며 한 구절을 읽는다.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감독(홍상수)과 배우(김민희)의 내밀한 사연 때문에 이 영화가 감독의 고백이자 항변으로 읽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장면과 대사는 그렇게 읽힌다. 둘 관계의 사연을 걷어내고 이 영화를 보기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다행히 고백과 항변은 있지만, 변명은 없다(그래서 찌질하지 않다). 용서와 동정을 구하지도 않는다. 고백 대부분은 시와 책을 통해 이루어진다. 영희가 “그냥 나답게 사는 거야. 흔들리지 않고 나답게 살고 싶어. 그것뿐이야”라고 말할 뿐이다. 항변은 천우의 목소리를 빌려 “할 일이 없어서 그래. 지들은 그렇게 잔인한 짓 하면서, 지들끼리 좋아하는 걸 불륜이래”라고 말하는 정도다. 


여배우의 관점에서 사랑 이후를 다뤘다.  사랑에 관한 한 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현재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사랑 이후를 다뤘다는 점이 놀랍다. 그것도 여배우의 관점에서. 그들도 많이 아플 것이다. 안톤 체호프의 소설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땐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선함과 악함의 분별보다는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는 순간은 사랑 이후가 될 터. 사랑에 관한 한 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사랑이 끝난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영화를 보고도 그 답을 찾긴 쉽지 않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좋아하던 책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랑이란 모든 걸 내 뜻대로 할 수 있어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건만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하는 거다.”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 중에서)  


건투를 빈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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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 영화는 또 한 편의 시와 관계가 깊다. 월트 휘트먼의 시 ‘On the Beach at Night Along.' 제목 그대로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홍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시의 제목만 따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시 내용은 아예 생각도 나지 않는다며. 그래서 이 시는 무시해도 좋다. 시 원문을 찾아보니 홍 감독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 포스터. 홍상수 감독이 직접 손글씨를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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