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를 둘러싼 흥미진진한 세계사 <사라진 스푼>
1981년 3월, 미 항공우주국(NASA) 기술자 5명이 시뮬레이션 우주선의 제어 장치 점검을 마치고 엔진 위의 좁은 방으로 들어갔다. 33시간에 걸친 길고 피곤한 하루가 막 끝난 참이었다. 하지만 몇 초 후, 그들은 의식을 잃고 “발레를 하듯 평화롭게” 쓰러진다. 구조대원이 신속하게 이들을 끌어냈지만, 결국 2명이 사망했다. 범인은 질소(N2)였다. 폭발을 막기 위해 비활성 기체인 질소를 모든 공간에 채웠는데 이것이 기술자들을 질식시켰다.
탈륨(TI)은 가장 치명적인 원소다. 탈륨이 일단 몸속에 침투하면 단백질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몸속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닌다. 적진 한복판에 침투한 스파이나 특공대처럼 말이다. 탈륨이 일단 침투하면 그 피해는 참혹하다. 그래서 이 원소의 역사는 핏빛으로 얼룩져 있다. 첩자는 물론, 고아, 돈 많은 할머니를 죽이는 데 사용했다. 미 CIA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신는 양말에 탈륨을 뿌렸다. 암살 시도는 결국 실패했지만, 탈륨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보여준다.
우리의 몸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원자는 별에서 왔다. 우리는 모두 별에서 온 것이다(사랑하는 사람이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 거, 단순한 착시가 아니다). 지금은 모두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중·고교 시절 배운 주기율표는 이 세상의 모든 원자를 하나의 표로 압축했다. 주기율표에는 결국 우주와 지구와 인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셈이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92개의 원소, 인공적으로 만든 원소 118개로 만들지 못할 것은 없다. 그때는 몰랐다. 주기율표에 이렇게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단순히 주기율표와 원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l 주기율표 동쪽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들
이정모 서울시립관장은 이 책을 이렇게 소개했다. “대학에서 생화학과 유기화학을 전공했지만 이건 모두 종로학원 수업의 확장에 불과했다. 화학은 주기율표에서 시작해서 주기율표로 끝난다. 주기율표에 있는 원소를 다루는 책은 많다. 여기에도 종결자가 있으니 <사라진 스푼>이 그것이다.”
물리학자인 김상욱 교수는 이 책을 소개하며 유려한 문장으로 주기율표를 묘사했다. “주기율표의 동쪽 끝에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들이 있다. 불활성 기체가 사는 세상으로, 이들은 다른 원자와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헬륨(He), 네온(Ne), 아르곤(Ar) 등이 여기 속한다. 이들은 원자 단독으로 기체가 되어 돌아다닌다. ‘나홀로족’이라 할만하다. 불활성 기체 바로 서쪽 이웃에는 할로겐족이라는 호전적인 기체 원자들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북쪽 끝에 최강 전투력을 가진 불소(F)가 있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전에 주기율표와 용어를 정리하면 좋다. 우선 원자와 원소. 원자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이다. 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느 원소의 원자인지에 따라 구조와 성질이 다르다. 원소는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종류다. 다음으로 주기율표. 원소의 종류와 성질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러시아 화학자인 멘델레예프가 처음 고안했다. 주기율표는 7개의 가로줄(행)과 18개의 세로줄(열)로 구성되어 있다. 행을 주기라고 하고, 열을 족이라고 부른다.
l 콩고 내전 촉발한 탄탈과 니오브로
준비가 끝났다면 본격적으로 주기율표에 새겨진 원소의 세계로 떠나보자. 이 책의 저자 샘 킨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로 이미 만만치 않은 ‘과학 입담’을 과시한 바 있다. 이 책에서도 특유의 입담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부제처럼 주기율표에 얽힌 인간의 광기와 사랑, 그리고 역사를 다룬다. 그렇다고 원소에 얽힌 에피소드만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원소와 주기율표를 통해 생물학과 물리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 사이를 종횡무진 누빈다. 그는 주기율표에 관한 이야기를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주기율표는 인류가 이룬 위대한 지적 업적 중 하나이다. 그것은 과학적 업적인 동시에 흥미진진한 이야기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해부학 책의 투명화가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깊이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그 이야기를 이루는 모든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기면서 보여주고자 이 책을 썼다(저자는 수은이라는 원소 하나에서 역사, 연금술, 문학, 법의학, 심리학 등을 동시에 발견했다고 한다).”
물론 이 책의 핵심은 원소를 둘러싼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다. 다소 생소한 이름의 베릴륨(Be)은 달콤하지만, 독성이 강하다. 노벨상 수상자인 엔리코 페르미는 실험 도중 베릴륨을 너무 많이 들이마셔 53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눈을 감는다. 사망할 당시 그의 폐는 휴짓조각처럼 찢어져 있었다고 한다. 라돈(Rn), 라듐(Ra), 폴로늄(Po) 등은 모두 일가족이다. 퀴리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라듐은 방사성 물질의 위험성을 인류에게 처음 각인시켰다. 요즘 국내에서 논란을 빚고 있는 라돈의 어미 핵종은 라듐이다. 라돈의 폴로늄의 어미 핵종이다.
탄탈(Ta)과 니오브(Nb)는 휴대전화기에 중요하게 쓰인다. 두 금속은 콜탄이라는 광물에 섞여 있는데 전 세계 공급량의 60% 정도가 콩고에서 나온다. 탄탈과 니오브의 수요가 급등하고 이게 돈이 되자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10여 년에 걸친 종족 분쟁으로 콩고는 비극의 땅이 되었다. 이 기간에 사망한 사람만 500만 명이 넘는다.
l 만약 외계인이 주기율표를 본다면?
이제 ‘사라진 스푼’의 비밀을 찾아 나설 때다. 왜 사라진 스푼일까? 19세기 프랑스 출신의 분광학자 르코크 드 부아보드랑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원소에 프랑스 지역의 옛 라틴어 지명인 갈리아에서 이름을 따 갈륨(Ga)이라고 정했다. 갈륨은 실온에서는 고체로 존재하지만, 녹는점이 29.8℃에 불과하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녹아서 수은처럼 변한다. 모든 화학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화학자는 장난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갈륨으로 하는 가장 흔한 장난은 스푼을 만드는 거였다. 뜨거운 차와 함께 손님에게 내놓는데, 손님은 찻잔에 담근 스푼이 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사라진 스푼’의 비밀이다.
책에는 원소 발견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부터 원소에 새겨진 탐욕과 모험의 역사, 원소와 관련된 과학자들의 일화까지 생생하게 녹아 있다. 이 세상이 원소로 이루어진 것처럼 원소와 주기율표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신화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샘 킨은 이런 말로 책을 마친다.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온다면, 나는 그들이 주기율표를 보고 우리의 독창성에 감탄하길 바란다.”
by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