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재시작 / 끝없는 뷰잉잡기/ 맘에 드는 집 첫 발견과 증발
- 워홀 9일 차의 일기
나는 이곳에 왜 온 걸까.
여기까지 올 준비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다 해놓고,
이렇게 런던에 한 집에 앉아 일기장처럼 이 글들을 쓰면서도, 이렇게 매번 되묻는 스스로가 조금 어이가 없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여기 온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계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가 되면 (물론) 아주 좋겠지만 그 이전에 내 가족을 사랑하고 내 사람들을 사랑하는, 어쩌면 큰 야망보다는 늘 작은 것들의 큰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여기에 왔다는 이유가 전부인 기분이 들고는 했던 요즘의 매일.
게다가 런던은 좋아하기에는 아직은 조금 더 경험이 필요할 것 같다. 사람은 너무 많고, 모든 곳이 더럽고, 사람들의 생김새들은 모두 낯설고, 나는 이 사회의 아주 소수를 차지하는 생김새이고,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를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여서 북적북적, 크고 작은 사건사고와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곳.
사실은 조금 예민하고, 불안이 높은,
위험한 행동이라면 질색부터 하는 내가 이곳에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기분이 새삼 종종 솟아오르고는 했다.
그래도 내가 이곳에 왔다면,
이곳에 다시 오고 싶었다면
그건 이유가 있겠지.
내가 모르는 어떤 운명의 이끌림 같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또 어쩌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나의 열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곳에 행복해지기 위해 온 것이었고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의무가 있다.
좁은 것보다는 넓은 게 좋고,
넓은 환경은 내게 자유감을 주곤 했으니까.
그리고 사실 집을 구하거나, 직장을 구하거나, 뿌리를 내리거나 하는 그 모든 것들은 어쩌면 나의 노력보다도 시기가 결정지어주는 것이라는 걸 이미 알 고 있기 때문 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물론, 당연히 일단은 노력을 해야 그 시기가 온다)
암튼,
그렇게 작은 마음들을 모아 정리를 해보는 나의 8일 차, 9일 차의 하루들 :)
1. 미루고 미뤘던 이력서를 써보자
사실 입국 3개월 전부터 이력서를 써보겠다며 사부작사부작 써보고는 있었는데 (적극적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중간에 프리랜서 일이 들어오면서 오로지 한 일에만 올인을 하게 되어, 그냥 홀라당 까먹고 말았다.
역시 두 가지 일은 못하는 나란 사람.
어디 하나의 꽂히면은 모든 것을 까먹고 그 세계에서만 들어가서 나오지를 못하며 즐거워한다.
물론 나는 그 시간들을 사실 아주 좋아하지만.
그동안은 집 구하느라, 적응하느라, 살 집 찾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어느 정도 메시지 뿌려놓는 것도 익숙해지고 또 더는 찾을 매물도 없어 보여서 오늘에서야말로 이력서를 시작하겠노라 작심을 하고 가방을 쌓다. 노트북 들고 카페 가기! 맛있는 것을 일단 쥐여주고 일을 하니, 나란 사람은 분명 절대로 탈주하지 않을 것이다. 2N 년 동안 쌓아온 데이터 같은 것이었다 이건.
새벽에 잠을 좀 설치는 바람에 늦게까지 자고, 아침 겸 점심 같은 늦은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길을 나섰다.
숙소 근처에서 조금 걸어가야 하기는 하지만 노트북 하기 좋다고 해서 찾아간 어느 카페.
심지어 아주 맛있었다!
물론 내가 견과류 알레르기가 조금 있다는 걸 까먹고 시켜버린 피스타치오 크림치즈 머핀이었기는 했지만...
(왜 맨날 까먹는지 모르겠다)
2. 처음으로 만난 맘에 드는 집! - 계약을 진행시켜 보자, 했지만 누군가 이미 내 집을 가져갔다 (feat. 직장 없는 자의 슬픔)
어제와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해가 아주 귀중하다던 영국 날씨.
약간 날씨감이 둔한가, 아직은 그렇게 나쁜지는 잘 모르겠다. 한겨울에는 장난 없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이런 색감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영국은 참 되게 사소한 것이 행복이 되는 나라다. 날씨가 너무 우울한 탓일까.
뷰잉 메시지를 너무 많이 보내고 있어서 여기저기서 연락이 정신없이 오고 있다. 정신없는 건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이나, 보내는 나나 마찬가지인 기분이 든다.
얼마나 시장이 빠른지 망설이는 게 사치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되도록 꼼꼼히 잘 보고 결정 지려고 노력했다.
내가 생각했던 우선순위는
1. 주변 안전 -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사이트 참고를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참고하였다!
2. 청결성
3. 책상의 유무 (공부와 작업이 중요해서, 그림을 그릴지도 모르잖아!)
4. 버짓
5. 욕조는 싫어요
였는데 우연히 그것이 딱 맞아떨어진 집을 오늘 발견해서 너무 좋아하며 뷰잉을 맞췄다.
너무 맘에 들어서 사진 찍는 것도 까먹었다니.. 생각해 보니 까먹은 것도 많다... 수압도... 체크해 볼걸.....
ㅠㅠㅠㅠㅠㅠ
일단은 집주인 분께 계약하고 싶다고 말을 한 상태인데, 이놈의 영국 사람들 답장이 너무 느려서 속이 터진다.
며칠 날 뷰잉 약속 잡을래 말래 해놓고 말 없다가, 그 해당 날짜 당일 아침에 우리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어때하는 식이다. K 국민인 나는 화가 난다 화가 나.
하지만 우선 참을 인으로 참고, 최대한 부드럽게 다시 물어가며 메시지를 돌렸다. 그리고 사실 나도 정신이 없지만, 그분들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메시지들을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나 먹고살기 너무 빡세다..
처음 해보는 계약이라 걱정이 더 앞서기는 하지만,
잘 처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혹시 몰라 보험으로 뷰잉을 세 개 정도 더 잡아 두긴 하였지만 서도..
->라고 했는데 저녁에 다시 연락이 와서 누군가 가져갔다고 한다. 아무래도 집주인은 좀 더 좋은 계약을 하는 사람에게 우선순위를 주는 것 같다. 나는 직장도 없고 6개월만 한다고 했으니 뺏긴 기분이..ㅠㅠ
세상이 빨갛게 물든다.
영국에는 커다란 나무가 많아서 아주 새빨간 색깔들로 물드는 것을 보는 재미가 꽤나 좋다.
여기는 색감이 한국과는 묘하게 조금 다른데, 왠지 모르게 훨씬 진한 느낌이 들곤 했다. 기후나 자연과학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예대생 출신(..)인 나는 잘 모르는 분야이지만 과학은 왠지 늘 멋져 보인다.
이곳은 나무의 입사귀도 뭐랄까, 훨씬 더 넓고 둥글다고 해야 하나.
3. 결국 나도 시켰다, 전기담요
+그리고 실물 몬조 카드도
며칠 전에 정말 너무할 만큼 추워서 전기담요를 주문했다. 원래는 이사 가고 살려고 했는데..
짐이 늘면 안 되는데 짐이 점점 조금씩 늘어서 큰일!
어차피 사기로 한 거였으니까, 잘 산 건 맞는 것 같다.
감기 걸리는 것보다는 백번 낫지.
예전에 영국에서 학교 다닐 때는 여기보다 더 남쪽이기도 하고, 새로 지어진 기숙사 건물이라 그렇게 춥다는 생각을 못 했었는데, 오래된 집이 웃풍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으슬으슬 추운 그런 추위인 영국 날씨. 근데 사실 생각해 보면 한국이 더 춥다는 게 함정이다. 여기와 거기는 조금 다른 추위다. 그리고 견디기 어렵게 느껴지는 건 둘 다 똑같다.
예전에 한국에서 뿌린 게 30개, 여기서 뿌린 게 한 10개쯤 된다.
영국은 취업이 되는 과정 자체가 늦으면 3개월 이상이 걸리고 한다고 하니, 언제쯤 일을 구할 수 있을지는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다 때가 있겠지.
게을러지지 말고, 그게 어떤 결과든 깔끔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심히 해보자. 단 나를 너무 상하지 않도록 무리하지 않고, 잘 돌보면서.
다들 오늘 하루도
파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