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 디자이너가 돌아본 성장의 조건
나는 첫 회사에 1인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합류했다. 그것도, 알고 들어갔다.
당시 이미 6군데 정도의 면접을 돌아본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어떤 회사는 조직이 안정적이었고, 어떤 회사는 사수가 있었다. 조건만 놓고 보면 더 안전한 선택지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이 회사의 대표를 만나고 나서 느낌이 달랐다. 이 사람 밑이라면 내가 잘 클 수 있겠다는 직감과, 사수가 없으면 내가 좋은 사수로 커주겠다는 마인드였다.
사내 유일한 프로덕트 디자이너. 옆에서 "이건 이렇게 해봐"라고 말해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하는 방식이 옳은지 틀린지도 모른 채, 매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굴러가야 했다. 설렘과 막막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바로 그 환경이 나를 가장 빠르게 성장시켰다. 아무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서야 했고, 그 과정에서 나만의 방식이 만들어졌다.
그 답을 찾는 데 가장 먼저 도움을 준 건, 의외로 책이었다.
우리 회사는 온보딩을 책으로 진행했다. 린 스타트업, 함께 자라기, 인스파이어드 같은 책을 읽고, 마인드셋이나 실험-검증 사이클, 각 포지션에 대한 이해를 팀원들과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회사에서 시키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고민과 맞닿는 부분이 많았다.
나는 출퇴근 거리가 왕복 3시간이었다. 매일 지하철에서 보내는 그 긴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출퇴근길을 독서 시간으로 바꿨다. 매일 아침 지하철에 타면 온보딩 책을 펼쳤고, 퇴근길에도 이어서 읽었다. 사실 비슷한 책을 이전에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땐 크게 와닿지 않았다. 막연히 "좋은 얘기네" 정도로 넘겼던 것 같다. 그런데 실무를 하면서 읽으니 완전히 달랐다. 오늘 겪은 문제의 실마리가 책 속에 있었고, 내 고민을 책에서 해소하게 되니까 읽는 게 진심으로 재밌어졌다.
이 독서 습관은 온보딩이 끝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왕복 3시간이라는 출퇴근 거리가 처음엔 피곤하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시간이 오히려 나만의 공부 시간이 되었다. 일하면서 생긴 궁금증을 책에서 찾고, 책에서 얻은 관점을 다음 날 실무에 적용해보고. 그 사이클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3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그러던 중 팀원들과 점심시간에 자발적으로 스터디를 시작하게 됐다. 혼자 읽던 책을 함께 읽으니 또 다른 차원이 열렸다. 같은 책을 읽어도 각자 다른 부분에서 공감하고,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유연함의 힘이라는 책으로 진행한 독서토론이었다.
그 책의 핵심 메시지는 이거였다.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결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없다. 오히려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호기심을 갖고 접근할 때, 훨씬 많은 아이디어와 실행력이 생긴다. 읽으면서 뜨끔했다. 1인 디자이너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나도 모르게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해"라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걸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마음을 바꿨다. 증명이 아니라 학습이라고. 실제로 그 뒤로 어려운 제품을 맡게 됐을 때, 이 마인드로 접근하니까 신기하게도 일단 시작하게 되더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배우면 된다. 그 생각 하나로 무서워도 할 수 있는 힘이 점차 생겼다.
아, 책이 참 좋은 거구나. 다른 사람이 수년간 쌓아온 혜안을 엿볼 수 있는 기회구나. 그때 처음으로 그렇게 느꼈다.
책에서 방향을 잡아갔다면, 실제로 그 방향을 시험하는 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협업이었다.
처음엔 주니어 연차의 개발자들과 함께했다. 나이도 비슷하고 에너지도 넘쳤다. 내가 제안하는 대로 "해보죠!"하며 쭉쭉 진행됐다. 다들 챌린지적인 걸 좋아했고, 새로운 시도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분들과 일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 덕분에 초반에 자신감도 붙었고, 실무 감각을 빠르게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5~10년 차 시니어 개발자분들과 함께하게 됐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내 기획에 대해 꽤 강한 피드백을 주시는 경우가 생겼다. 물론 말씀은 언제나 굉장히 부드럽게 하셨다. 하지만 그 내용 자체가 날카로웠다. "이 기능은 왜 이렇게 설계한 거예요?" 같은 질문 앞에서, 처음엔 나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올라왔다. 내 결정이 틀렸다고 지적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해보니, 결국 우리는 같은 기능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목표는 같았다. 다만 그분들의 피드백은 더 넓은 경험치에서 나온 것이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거치며 "이런 방식은 나중에 이런 문제가 생기더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던 거다. 그걸 깨닫고 나니, "이 사람이 왜 이런 의견을 제시했을까?"에 좀 더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피드백에 상처받지 않고, 오히려 몰입해서 더 좋은 결과물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상대의 의도를 이해하려는 태도. 그게 자리 잡으니까 협업의 질 자체가 달라졌다.
그리고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피드백에 대답을 하다 보면, 내가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던 것들을 근거로 정리해서 말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왜 이렇게 설계했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내 판단의 이유를 선명하게 꺼내야 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무의식이 의식으로 바뀌었고, 그렇게 정리된 근거는 다음 프로젝트에서 또 다른 기준점이 됐다.
결국 피드백은 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책과 피드백으로 성장해갈 수 있었던 건, 결국 함께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우리 팀은 20~30대의 팀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통 관심사도 비슷했고, 다들 알아서 일을 찾아서 하는 분들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고, 성장에 진심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업무 외적으로도 좋은 정보가 있으면 스스럼없이 공유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이 아티클 좋더라", "이 영상 한번 봐봐" — 그런 작은 나눔이 일상적이었다.
점심시간에 자발적으로 스터디를 만들어 진행한 것도 그런 흐름의 연장이었다. 누군가가 "이 책 같이 읽어볼래요?" 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였다. 강제가 아니라 자발이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부담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이었다.
이런 건 정말 귀한 거다. 사실 혼자서는 마음먹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막상 시작하지 못하고, 도전해보고 싶은 건 많은데 혼자선 엄두가 안 나고. 그런 사람에게는 트리거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점심시간 스터디나 사내 독서모임이 바로 그 트리거였다. 덕분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고, 미뤄왔던 공부를 실제로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흥미로운 건, 이 안에서 받은 게 많아지니까 자연스럽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거다. 내가 먼저 좋은 자료를 공유하게 되고, 내가 아는 걸 정리해서 나누게 되고. 받기만 하던 사람이 주는 사람이 되는, "Giver"가 모인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서로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좋은 팀을 만드는 건, 뛰어난 스킬이나 화려한 이력이 아니라 결국 좋은 마인드셋의 사람들이라고.
돌이켜보면, 첫 회사가 내게 남긴 가장 큰 것은 하나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스스럼없이 모으고, 함께할 사람을 찾고, 다음을 실행할 수 있는 힘.
혼자 굴러가야 했던 1인 디자이너 시절, 나는 책에서 방향을 찾았고, 피드백 속에서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으며,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는 법을 배웠다. 어느 하나 빠졌어도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들이 얼마나 큰 자산이었는지 한창 일할 때는 잘 몰랐다. 바쁘게 굴러가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발짝 물러서서 돌아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찾아서 읽는 습관, 좋은 사람을 만나면 함께 배우려는 태도, 두려워도 일단 시작하는 용기. 그게 전부 첫 회사에서 만들어진 거였다.
그 안에 있을 땐 몰랐는데, 돌아보니까 오히려 선명해졌다. 그때 만들어진 엔진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를 움직이게 할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당신이 지금 첫 회사에서 혼자 막막하게 굴러가고 있다면, 이것만 기억해주면 좋겠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태도를 바꿔라. 환경이 어떻든, 현상을 어떻게 풀어갈지 사고하는 방식은 온전히 내 영역이다. 틀렸을까 봐 두려운 것들은 결국 선택하기 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그 선택을 맞는 선택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지금 겪고 있는 시행착오 하나하나가, 나중에 당신을 움직이게 할 가장 강한 힘이 된다. 지금은 잘 모르겠더라도, 그건 이미 쌓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