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공감이 50%일 수밖에 없는 이유

50%로 충분한 순간들

by 블레어리


"나도 그 기분 알아."


힘든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이 말을 건넨다. 나도 그랬고, 내 주변 사람들도 그랬다.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날,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열었을 때 — 돌아오는 건 늘 이 한마디였다. 나도 그 기분 알아. 힘들었겠다.


고마웠다. 진심이었을 거다. 그 사람들은 정말로 나를 위로하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 한쪽에서 작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정말로 이 기분을 알아? 이 사람은 내가 그 사람과 나눈 시간을 모른다. 내가 그 관계 안에서 어떤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 어떤 말 한마디에 흔들렸는지, 어떤 침묵이 나를 무너뜨렸는지. 회사에서 내가 왜 그 피드백에 그렇게까지 흔들렸는지, 그 프로젝트가 나한테 어떤 의미였는지 — 그걸 이 사람이 어떻게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설령 비슷한 일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건 '비슷한' 일이지 '같은' 일이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온 궤적이 다르다. 같은 사건이라도 그걸 받아들이는 파동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스치듯 지나가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한다. 그건 그 사람이 지금까지 쌓아온 삶의 경험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건 작은 사건들이 겹겹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거고, 인간은 결국 자기가 경험한 범위까지만 상상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그 기분 이해해"라는 말은, 아무리 진심이어도 100%가 될 수 없다.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구조적인 한계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상대에게 서운하지 않았다.

이게 좀 의외일 수 있는데, 진짜 그랬다. 화가 나거나 외롭다는 감정보다는 오히려 담담한 쪽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본인이 살아오면서 쌓은 경험치를 총동원해서, 자기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감을 나에게 건네고 있는 거니까. 그게 내 감정의 50%에 닿든 70%에 닿든, 그건 그 사람의 최선이다. 그 최선을 두고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위로를 받고 집에 돌아오면, 결국 그 감정을 마저 꺼내 들여다보는 건 나 혼자였다. 이불 속에서, 샤워하면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 아까 그 대화에서 풀리지 않았던 감정의 꼬리를 잡고 천천히 되짚는 시간. 그때 깨달았다. 내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내는 건, 결국 그 감정을 직접 겪고 있는 나 자신이라는 걸.

누군가의 위로가 닿지 못하는 마지막 몇 센티미터.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화살이 되어 나한테로 돌아왔다. 나도 똑같이 하고 있었으니까. 살면서 얼마나 많이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나같으면 저렇게 안 할 텐데. 왜 저런 태도를 갖는 거지. 왜 저런 선택을 하는 거지. 그게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 공감의 한계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보였다. 내가 그 사람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내 경험치 안에서만 상대를 재단하고 있었던 거다. 상대가 나를 100% 이해할 수 없듯이, 나도 상대를 100% 이해할 수 없다. 그 단순한 사실을 나는 한쪽 방향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것. 남이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이해해야 하고, 내가 남을 다 안다는 착각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50%로도 충분한 순간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모순이 생긴다.

공감이 완벽하지 않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공감을 하고 살아가는 걸까? 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거기서 위안을 얻는 걸까?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낌이 달랐다. 디테일은 물론 달랐다. 겪은 일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달랐다. 그런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이 사람은 이게 뭔지 안다"는 감각이 올 때가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결 같은 것. 그게 내가 그 자리에서 느낀 울림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세포 단위의 공감, 그러니까 "너의 그 감정을 내가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똑같이 느낀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덩어리째 울리는 공감은 존재한다. 살아오면서 닦아온 결이 비슷한 사람들, 큰 맥락에서 가치관의 흐름이 겹치는 사람들 — 이런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 세부는 달라도 어떤 울림이 생긴다. 디테일이 아니라 방향이 같은 거다. 정확히 같은 파도를 맞은 건 아니지만, 같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감각. 그게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찾고,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끌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그 정도의 울림이면 함께 살아가기에 충분한 순간들이 있다.



나를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

공감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 내 삶에서 하나 분명하게 달라진 게 있다. 상대에게 상처받는 일이 확 줄었다.

예전에는 누군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면 속이 상했다. 왜 몰라주지, 왜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지 — 이런 마음이 올라왔다. 그런데 나와 상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진짜로 받아들이고 나니까, 그런 기대 자체가 사라졌다. "아, 그냥 다르구나."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인정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주위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자신을 알라고. 나는 이 말이 그냥 자기계발서에서 흔히 보이는 뻔한 문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짜로 나를 들여다보고, 내가 어디서 흔들리고 어디서 단단한지를 알게 되면 —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하루가 무너지지 않는다. 나를 이해하면 나를 믿게 되고, 나를 믿으면 묵묵히 내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완벽하지 않다. 어쩌면 완벽한 공감이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알게 된 뒤에, 나는 오히려 사람 곁에 더 편하게 있을 수 있게 됐다. 상대가 나를 전부 이해해야 한다는 무게를 내려놓으니까, 그 사람이 건네는 서툰 위로도, 어긋난 조언도, 그냥 옆에 앉아 있어 주는 것도 — 전부 고마워졌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아는 사람은, 불완전한 것들 앞에서 덜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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