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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희 Apr 16. 2023

아-아아-
내 커리어가 어때서

기획자 준희씨의 일일

한동안은 정말 쓰는 게 힘들었더랬다. (요즘 드는 생각인데, 나의 글은 꼭 이렇게 고해성사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말이야-같은 뉘앙스의, 한숨 섞인 말들. 자주 고백하며 산다.)


작년 이맘때쯤 본업에 집중이라는 걸 해보겠다고 기획단계부터 함께 했던 팀라이트에서 나오게 되었고, 서비스 기획과 PM역할을 하며 현대 아이오닉 6 광고 프로젝트에 매달리기를 몇 개월.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그 기간에 팀라이트를 하겠다고 아등바등거렸다면 다른 작가님들에게 정말 큰 피해가 될 뻔했다. 철야에 배달음식에 48시간 근무까지 몰아쳤으니까. 나의 본업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갑작스럽게 덮친 플젝의 규모에 내가 나가떨어졌다. 작년 8월에 퇴사를 결심하며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했고, 일주일에 한 번꼴로 눈물 지어가며 일했으며, 회사에서 나에게 내어준 택시비만 해도 1달에 100만 원이 넘었다.(회사가 나에게 잘해줬다는게 아니다. 모두 새벽 철야 택시비였다. 당시 택시비 인상 전, 하남에서 강서까지 택시비로 4만원 가량 나왔으니 나는 통상적으로 한달에 근무하게 되는 20일 중 25일을 택시타고 집에 간 셈이다.) 이제와 얘기지만, 정말 나 스스로에게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택시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풍경이 퍽 쓸쓸했달까. 매일 기운 없이 뜯는 배달음식의 일회용 뚜껑이나 랩 따위의 것들이 서글펐달까. 내가 먹고 보는 것이 나를 이룬다던데, 이런 것들이 나를 이뤄도 괜찮은 건가. 


괜찮았을 리가 없다. 열심히 한 덕과 약간의 운이 도와 내가 담당하는 콘텐츠의 평이 꽤 좋은 편이었고, 플젝은 얼추 마무리가 됐지만 세 달 넘게 쏟아부은 내 체력과 눈물에 회사는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공개적으로도 수고했다는 몇 마디 없었고, 인센을 준다고 했지만 결국 내가 퇴사를 결심했을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퇴사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어떠한 면담 따위는 없었고, 그저 알겠노라. 그게 다였다. 나는 그간 사용하지 못한 휴가를 쓰고 내 몸을 보살폈다. 플젝이 끝나자마자 코로나가 찾아온 덕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직 준비도 함께 해야 했으니, 기분은 꽤 좋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일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직장생활은 다 이래? 빌어먹게도 8월의 날씨는 꽤 맑았다. 


이직은, 다행히 거의 바로 할 수 있었다. 프로이직러의 칭호를 얻게 되었지만 허탈한 마음은 꽤 오래갔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기간이라는 핑계도 이제는 쓸 수가 없다. 이직한 지 벌써 8개월이나 지났으니까. 무적 같은 변명이 내 손을 떠나갔다. 난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트업의 흔한 고인물이 되었으니까. 









올해로 넘어오면서 나에게 닥친 가장 큰 딜레마는 다름 아닌 나의 일이었다. 

이직할 때도, 연차가 넘어갈 때도 나의 커리어는 항상 먹구름처럼 잔뜩 어둑해져서 나를 덮었다. 


네가 한 일들이 너를 설명하겠지.
그래서 너는 너의 커리어를 정의 내릴 수 있어?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내 커리어의 시작은 영화제 행사 기획, 축제 기획이었고, 이런저런 기회로 라이브 총괄도 두어 번. 프로그램 운영은 당연하고 NGO 대외협력 담당자로써 모금도 해보고, 몇억 되는 운영비를 회계처리도 해봤고, (나에게 맞는 일은 아니었다.) 사이드프로젝트로 진행했던 잡지 창간, 노트 제작 펀딩... 서비스 기획, 공간 기획...

누군가는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해봤다며 칭찬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곳저곳 발만 담갔다가 뺀 기분이랄까. 저걸 다 내 지난 3년에 걸쳐했었고, 하나를 붙잡고 1년을 넘지 않으니 인사 담당자던 대표던 나의 커리어가 썩 미소 지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해 N잡러라는 수식이 나를 정의 내리기도 했었다. 근데 그건 사실, 본업이 안정화가 되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누구는 파이프라인을 설계하고 산다는데 나는 그냥 굴러다니는 원통형을 들고 어떻게 묶어야 될지 모르는 9살쯤 된 것 같았다. 아직도 모르겠긴 하지만, 일단 어디 하나에 원통을 꽂기라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 건축물도 중간부터 만들어지진 않으니까. 바닥부터 쌓기 마련인데 나는 바닥돌도 아직 못 정한 초보 건축가였다. 스테르담 작가님이 오래전 했던 말처럼, 글을 쓰려고 해도 본업이 안정적이어야 지속가능하다. 내 수중에는 지속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뭐라도 정리가 되어야 했다.
안정감과 안전함이 필요했달까. 



브랜드 마케터를 지원했지만 내 커리어를 보고 경영진은 나에게 브랜드 매니저를 제안했다. 그에 응하고 몇 개월 내내 BM직을 달고 일했다. 경영진에게, 팀원들에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무실 창고 정리가 전혀 안되어있다는 말을 들은 주에는 창고에 들락날락하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파악했다. 아카이빙 되는 방식도 파악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문제라고 생각되는 점을 물어가며 각자의 니즈를 파악헀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 해결법을 제시했다. 노션으로 팀 내 모든 일을 홈페이지화 시키기도 했다. 다행히 팀원들의 반응은 좋았다. 경영진의 반응도 적당히 살펴가며 그렇게 쫌쫌따리로 이것저것 팀 내 프로세스나 문화를 리뉴얼해 봤다. 지난 8개월 동안 어떤 것은 실패하고 어떤 것은 성공했다. 가장 큰 성과는 팀원들이 나를 많이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입사 초기에 목표했던 해결사 포지션에 안전하게 들어섰다. 상품이나 매출은 아직 몰라도 온갖 정리와 문제 정의, 결과도출은 자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큰 산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경영진과 합의한 나의 직책명이었다. 화장품 회사의 BM은 응당 상품 기획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크림 하나로 스킨케어를 끝내는 사람. 선크림을 바르긴 하지만, 안 바를 때도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 여드름도 잘 나지 않는 막피부(?)인지라 스킨케어의 중요성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물론 많은 BM들이 화장품을 좋아한다고 BM이 될 수 없다고들 하지만, 이것저것 하면 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지식이 없고 그거 말고도 나는 할게 많았다. 몇 개월 동안 내게 상품 기획의 기회가 오지도 않았다. 경영진이 직접 상품 기획에 참여하다 보니 권한이 크게 없었고 나에게 상품 기획을 알려줄 사수도 없었다. 



이런저런 이슈로 조직이 개편되면서 팀 내 개개인에게 피드백하는 시간이 있었다. 개편을 발표하기 전 나에 대한 경영진의 피드백은 당연 "상품기획을 할 줄 모른다."였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흐린 눈을 하고는 무시하고 있던 일. 마음속 한 구석을 차지한 먼지 쌓인 책들처럼 건드리기 어려운 일. 착잡한 마음으로 긍정했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내 커리어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나는 또 막막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가벼운 일이 아니지만, 중요한 일이고 그렇게 평가받고 있지만, 나는 또다시 불안정했다. 어쨌든 내가 하는 일은 브랜드 매니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얼마 전 고연차 사수가 생긴 옆 팀의 신입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도 누가 내 일을 좀 끌어줬으면, 내 행동에 옳고 그름을 대충이라도 알려줬으면, 나도 이 비 내리는 마음에 지붕이 있다면.




내 커리어는 또 그렇게 한번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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