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망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발아래 미세한 진동, 쾌적한 듯 인위적인 공기, 창 밖에 멀어지는 지붕들.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땅 위로 구름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빠 차가 집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을 땅, 오늘 아침 눈을 떠서 세수하고 이를 닦고 양말을 신고 코트를 입었던 우리 집이 있는 땅. 이내 이륙을 마친 명쾌한 기내 방송 음이 들려왔다.
눈앞에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게 지금 내게 처한 현실이라는 것이, 내가 어른이 된 게 맞는지 아닌 지 365일 의심했던 스무 살을 지나 막 스물한 살이 된 겨울이었다. 여전히 나는 성인이 아닌 것만 같았다. 꼭 보호자 없이 가출한 아이 같은 기분이 들어 겁이 나면서도 한편으로 설레었다. 사고 치고 나서 왠지 모르게 뿌듯한 아이처럼, 나는 이 기쁨을 그냥 누리기로 했다. 도착 시간까지 꼬박 하루 정도의 긴 시간이 안정감을 주었다.
수첩을 꺼냈다. 심장이 콩닥거리는 탓에 잠이 올리 없었다. 영화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내 인생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중하게 느껴졌고, 그런 기분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수첩에 프랑스로 떠난 날을 주제로 현재의 기분, 도착해서 해야 할 것,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나날들에 대한 기대들을 적어 내려갔다. 십 대를 점철했던 진절머리 나는 환경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빠져나갈 틈이 없었던 견고했던 관계들, 그 안에 떠도는 목소리와 시선들, 그런 감시의 눈들이 나를 옥죄어왔고, 종종 시선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나는 나 자신이 되지 못해 왔던 나날들이 억울했다. 마침내,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었다.
내 유년시절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말을 아끼는 편인데, 그건 뭉개서 설명한다면 분명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것 같고 사실 이해받지 못해 상처받을 내 마음이 신경 쓰여 때문에 애초에 실마리를 숨겨놓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앞에 화면을 보니 비행기는 아직 도착지보다 출발지인 대한민국의 코 앞에 있었다. 물리적인 거리로는 한 발짝밖에 안 떠났는데 내 기분은 이미 프랑스에 도착하고도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얼른 도착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도착하면 혼자 해결해야 할 낯선 관문들이 많은데 그걸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안온하게 티켓에 적힌 내 지정석에 얌전히 앉아있는 것 만이 좋았다. 이렇게 수동적인 자세로 일탈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내겐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비행이었다.
프랑스에 있을 근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한국에서는 유행을 반영하지 않은 옷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서 트렌드의 흐름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프랑스에 가면 '프렌치 시크' 스타일로 무심한 듯 멋스러운 옷을 입고 다녀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유창하게 프랑스어를 하는 파리의 미대생이 되어있을 내 모습을 상상했다. 사랑과 좌절, 공허함 같은 주제로 시적인 회화 작품을 그려내고, 저녁이 되면 불빛이 일렁이는 센강을 따라 산책하는 여자. 나는 그런 여자가 되는 길에 벌써 한걸음 내디뎠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터무니없는 상상은 꼬리를 물듯 이어졌고 나는 모든 버전의 나에게 자아도취 하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리옹 생텍 쥐베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시경이었다. 출발했던 인천 공항과는 달리 무료하고 나른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짐을 찾고 공항에서 기숙사까지 찾아가야 하는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나는 마음이 조급했는데 어쩐지 낯설고 느린 그 공기의 흐름과 결이 안 맞았다. 짐을 찾고 밖으로 나와보니 1월인데 날씨가 늦가을 날씨처럼 포근했다.
공항 앞에 대기 중인 택시 중 하나에 올라타서 비행기에서 적어온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쪽지에는 기숙사 주소를 적어두었었다. 택시 기사는 내게 몇 마디 말을 걸었는데 나는 봉쥬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10개월 동안 프랑스어 학원을 다녔고 기본기를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현지인 앞에 서니 머리가 하얘지고 목이 메어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종이쪽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대충 상황을 파악한 기사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라디오 방송 볼륨을 높였다. 나는 기숙사를 향해가는 택시 안에서 울려 퍼지는 프랑스어 라디오 방송에서도 단 한 단어도 알아듣질 못했고 도로의 풍경은 한국이랑 별반 다르지 않아 보여서 조금 실망했다.
40분쯤 지나 드디어 리옹 시내로 들어왔다. 내가 그리던 낭만적인 프랑스 도시의 풍경에 접어드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의 삭막한 도로 풍경만 봐서는 내가 프랑스에 온 건지 다시 한국에 온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었는데 차가 구시가지 쪽으로 들어오자 이국적이고 유럽 스러운 풍경 속에 내가 들어온 것이 마음에 들었다. 큰 나무가 드리워진 길목에 기사가 차를 새우더니 여기가 맞냐고 물었다. 나는 맞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택시 기사는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여기가 맞다며 짐을 꺼내 입구까지 들어주었다.
입구 데스크에는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갈색 머리 여자분이 계셨다. 나는 준비해 온 서류들을 다짜고짜 내밀었다. 봉쥬르를 스킵해선 안된다는 걸 그땐 잘 몰랐다. 갈색머리 여자는 내게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지 묻고는 영어로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배정받는 방은 5층인데 평소에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다만 오늘은 짐을 올려야 하니 엘리베이터를 사용해도 된다며 엘리베이터로 나를 안내했다. 공중화장실 칸 만한 작은 엘리베이터에 캐리어 두 개와 몸을 싣고 5층으로 올라갔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엘리베이터가 안전한 건지 의심되었다. 5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고, 그 앞에 수동 문을 한번 더 밀어 제쳐야 했다. 문 밖에는 길고 좁은 복도가 펼쳐졌고, 양 옆으로 기숙사 방의 문들이 보였다. 소실점 기법을 처음 공부할 때 그렸던 것 같은 구도였다. 점점 좁아지는 복도 양 옆으로 점점 작고 촘촘해지는 문들. 한 층에 방이 몇 개인지는 모르겠지만 족히 30개는 되어 보였다.
드륵드륵드르르르륵- 파란색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반을 좀 넘게 온 지점에서 갈색머리 여자는 여기가 내 방이라고 했다. 열쇠를 넣고 돌린 후 방문을 열어 나를 들여보내주었다. 고개를 돌려볼 필요도 없이 한눈에 방이 다 들어왔다. 그날 이후 나는 9미터 제곱의 감각을 잊지 못한다. 문 뒤에 작은 세면대와 눈앞에 싱글베드보다 더 작은 요가 매트 폭 정도 되어 보이는 침대, 그리고 방 끝 벽에 붙어있는 책상, 책상 앞에는 큰 창이 있었다. 방은 이해할 수 없는 형광 연두색으로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침대 옆 바닥은 내 캐리어를 펼칠 수도 없이 좁았다. 일단은 혼자 있고 싶어서 갈색머리 여자분께 감사인사를 전하고 나중에 궁금한 것이 생기면 로비 데스크로 찾아가 물어보겠다고 했다.
침대에 털썩 앉아보았다. 매트리스가 얇아서 전혀 쿠션감이 없어 생각보다 엉덩이가 아팠다. 장시간 비행 후 몹시 피곤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지만 집에 있는 내 침대와 이불만 똑 때서 가져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형광빛 기숙사 방에서, 9미터 제곱의 공간에서 고작 몇 시간 전 비행의 기억이 모두 전생 같이 느껴졌다. 나는 덩그러니 놓인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숨을 죽인 채 자유를 온전히 자유를 느껴보았다.
9미터 제곱만큼의 자유를.